김기창
金基昌1872. 7. 2 ~ 1950. 9.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흥사단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3)
관련 사건
- · 105인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3) 1872년 7월 2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주내면(州內面) 홍남동(弘南洞)에 태어났다. 김문옥(金文玉)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06년 의주에서 서점을 경영하는 한편, 1908년 김지하(金志河)와 함께 의주 남문 밖 구세병원(救世病院) 설립에 이바지하였다. 1908년에 신민회(新民會) 의주지회(義州支會)의 반장과 사찰로 활동하였다. 1910년 105인사건(데라우치 암살미수사건) 당시 이기당과 함께 단총 14정을 구해오는 역할을 하다 붙잡혔으나 심문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1914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1919년 10월 3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민족대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고 도산 안창호(安昌浩)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 퉁저우(通州, 현 베이징시 퉁저우구)를 베이징(北京) 시내로 진출하는 한인사회의 중심지로 개발하였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상하이에 있는 독립운동 인사와 교류하였다. 상하이를 떠나 활동 근거지를 옮긴 후 난카이(南開中學) 교장 장보어링(張伯苓)을 찾아가 한국 청년의 교육을 부탁하고, 또 이들을 독립운동을 위한 후계 인재로 양성할 것을 요청하였다. 장보어링은 그와 한국의 처지에 동감하고 베이징의 회문중학(匯文中學)과 퉁저우의 노하중학(潞河中學)을 소개하였다. 그는 베이징과 퉁저우에 와서 학교와 연락을 취하여 중국에 유학 온 한국 청년들을 위의 두 학교에 보내 교육시켰다. 모든 일을 정리한 후 퉁저우의 복흥장(復興庄)에 거주하면서 한인 청년을 지속해서 중국 학교에 입학시키는 한편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자택은 일시적으로 베이징과 톈진(天津)으로 망명해온 한인독립운동 인사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베이징에 진출했던 독립운동가는 대부분 그의 집에서 머물었으며 이 같은 활동을 통해 베이징 지역 한인의 활동무대는 더 넓어질 수 있었다. 독립운동을 지속해서 진행하려고 독립자금을 모으고자 안창호와 함께 베이징의 해전(海甸)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가족과 함께 퉁저우에서 젖소 수십 마리를 사육하여 우유를 판매하고 포도밭 경영으로 큰 수입을 올렸고, 대부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였다. 한편, 조선인야소교회에서 임직을 받고 계속해서 농장도 경영하며 독립운동에 기여하였고 이후에도 안창호·이종오(李鍾旿)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지속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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