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규
金柄奎1890. 11. 3 ~ 1985. 1.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완도청년연합회
- · 완도노농연합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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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3) 1890년 11월 3일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대신리(大新里)에서 김서욱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이명은 김병규(金炳奎)이다. 어렸을 때 한학을 수학하고 일제강점기 완도 지역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이끈 대표적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찍이 소안도의 송내호(宋乃浩)·신준희(申晙熙) 등과 교분을 쌓고, 1920년대 초 완도 대신리에 대신무산유치원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1924년 완도 소안도에서 송내호·최평산(崔平山) 등과 함께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완도군 내 7개 청년회와 9개 노농단체를 묶어서 완도청년연합회와 완도노농연합회를 결성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완도 청년회운동은 1920년 6월 완도청년회(회장 나봉균(羅鳳均), 총무 김장렬(金壯烈))부터 시작된다. 완도 지역에서는 같은 시기 완도청년회 외에도 소안도에 배달청년회가 지·덕·체 함양을 기치로 창립되었다. 1924년 금일도에서는 금일청년회(회장 임홍기(林弘基))가, 청산도와 대모도에도 각각 청년회가 창립되었다. 이처럼 완도의 각 면에서 청년회가 구성되고, 이를 하나로 묶는 완도청년연합회가 결성되자, 완도 청년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25년 1월에는 완도무산청년회(莞島無産靑年會) 임시대회 사회를 맡기도 하였다. 완도무산청년회는 1920년 문화운동을 목표로 결성된 완도청년회가 1925년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완도무산청년회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1926년 6월에는 합리적 신사회 건설을 표방한 비밀결사 ‘살자회’를 결성하고 선전부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살자회의 강령은 ‘첫째, 우리는 상호부조와 정의에 희생할 정신함양을 도모함. 둘째, 우리는 신사회 건설의 속성을 도모함’ 등이었다. 살자회 집행위원으로는 신준회 외 6명이 선출되었다. 살자회는 같은 해 6월 집행위원회에서 사상동맹과 중앙협의회 출석 대의원으로 정남국(鄭南局)과 신준희를 각각 선임하고 각 부서별 집행위원을 선임하였다. 서무부는 최평산·최형천(崔亨天), 연구부는 송내호가 맡았고, 이때 신준희와 함께 선전부를 맡았다. 살자회의 집행위원은 그를 제외하고 모두 소안도 출신이었다. 이른바 ‘배달청년회 사건’ 판결문에 의하면, 최형천·최평산·강정태(姜正泰)·신준희·송내호 등과 함께 6인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여기에서 농민운동은 소작농을 중심으로 하되, 자작농을 포함한 농민 대중의 운동을 지향하고, 노동운동은 비타협 정신으로 경제적 해방에 주안점을 두고, 청년운동은 무산청년운동의 지도적 정신하에 민족주의 청년운동과의 협력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한편, 신간회 완도지회는 1927년 말이었다. 같은 해 8월 28일 완도 읍내 중학원에서 신간회 본부 상임간사로 선임된 소안도 출신 송내호 입회하에 설립되었다. 지회 회장에는 임재갑(任在甲)이 선출되었고, 서무부·재정부·조직선전부·조사연구부·서무부·재정부·정문부·조사연구부를 두었다. 조직선전부를 맡았다. 임재갑은 완도 신지도 출신이며 수의위친계 회원으로 1925년 신지면 사립학술강습소 교사로 있으면서 순회강연회를 조직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구속 기소되어 10개월 옥고를 겪고 출소한 인물이다. 또한 신간회 완도지회 집행부 상당수는 완도청년연합회 임원을 역임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신간회 완도지회는 이후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같은 해 10월 소안도의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송내호를 비롯한 이들이 대거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13명의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1929년 3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다음 해인 1930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한편, 전남 완도 대신리는 1925년 면화 공판을 위한 면화판매소 설치를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무산되자 조합원 270명이 군청에서 농성하는 등 저항이 심한 지역이었다. 1928년 1월 5일 대신리 주민 이응길(李應吉)·장명재(張明在)·이정인(李正仁)·허치성(許致成)·이일봉(李一峰) 등과 함께 대신치원에서 모임을 갖고 대신리 신우회라는 조직을 결성하였다. 후에 재판 과정에서 일제 당국은 신우회가 야학을 위해 결성된 것이며, 사유재산을 부인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밀결사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우회는 ‘농민본위의 신사회 건설, 약자 원조 강자 배척’ 등을 강령으로 신사회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출옥 후인 1931년 완도 대신리유치원에서 경제학 강좌를 열어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하였으며,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 쓰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1년 윤덕진(尹德津)이라는 당시 15세 소년에게 ‘국어와 일본어’라는 제목의 강연 원고에 반일 내용을 써주기도 하였다. 즉, “무엇 때문에 한국어를 국어라 하지 않고 일본어를 국어라 칭하는가. 국어는 그 나라의 국민성을 함양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에게 자국어를 말살하고 외국어, 즉 일본어를 자국어라 하여 가르치는 것은 국민성까지도 근본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써주었다. 결국 1933년 1월 신우회 조직과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완찰서 경찰 20여 명이 완도 대신리를 급습해 붙잡혔다.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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