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호
金相浩1880. 11. 19 ~ 1947. 5.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5) 1880년 11월 19일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신등면(新等面)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산청군 신등면과 단성면(丹城面)의 만세 운동은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하러 상경했던 김상준(金相峻)과 윤규현(尹圭鉉)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만세 소식을 고향에 알리면서 비롯되었다. 김상준의 아버지이며 인근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던 유림인 김영숙(金永淑)이 만세 운동을 계획할 때, 김영숙과 뜻을 같이하여 만세 운동 준비에 가담하였다. 당초 이들은 거사일을 3월 19일로 정하고, 김상준은 김기갑(金基甲)·윤치현(尹致鉉) 등과 함께 청소년을 총동원하려고 3월 18일 밤 마을에 이 소식을 알렸다. 3월 19일 아침 이들이 청소년들을 이끌고 신등면 단계리(丹溪里) 시장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이 달려와 김상준·김기갑(金基甲)·김동민(金東玟)·윤치현·정현숙(鄭鉉淑) 등을 단계 일본군 헌병대로 연행하였다. 끌려가는 이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자 거리에서 남녀노소가 만세를 부르며 이들을 뒤따랐다. 그러나 일본군 헌병들은 총검으로 군중들을 난타하여 해산시켰다. 19일 거사가 실패하자, 김영숙·정태륜(鄭泰侖)·권숙린(權肅麟)·김선림(金善林)·김상문(金相文) 등과 함께 긴급 모임을 갖고 3월 20일 단계리 시장과 3월 21일 단성면 성내리 시장에 다시 만세 시위를 결행하기로 하였다. 3월 20일의 시위는 신등면 단계장터에 모여 단성면 성내리 장터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시위 행렬을 단성면 성내리 장터로 이끌었다. 오후 2시 단계장터에 600~700명의 군중이 모이자, 주동 인물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성내리 장터로 향하였다. 오후가 되자 군중이 합세하여 그 수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가 성내리 장터에 도착하자 일본 헌병대에서는 김영숙과 정태륜에게 구금한 김상준 등 5명을 석방해주는 대신 군중을 해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시위대는 거리를 누비면서 밤이 늦도록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결국 일본 헌병대는 무력 진압에 나서 주동자 29명을 체포하였다. 다음 날인 3월 21일 오후 1시 단성 장날을 맞아 모인 군중과 성내리 장터의 시위 인파가 합세하여 다시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였다. 진주와 거창에서 지원 나온 일본군 80~90명이 도착하자, 헌병대는 무자비하게 총격하여 시위 군중 가운데 11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이 일로 붙잡혀 이 해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