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봉
金鳴鳳1893 ~ 1924. 7.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노희태의진
- · 대한독립단
- · 기원독립단
- · 한국판의단
- · 대한통의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93년경 강원도 원주군(原州郡)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평안북도 운산군(雲山郡), 경상남도 등 출생지가 여러 자료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신상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된 일제의 외무성 기록문서인 ‘한국판의단(韓國判義團)의 흉폭계획(兇暴計劃)에 관한 건’에 기재된 내용을 따랐다. 김상영(金相英)이라는 이명이 있다. 가정형편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통신문 정도는 해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해산 군인인 노희태(盧熙泰)가 포수 수백 명을 모집해 영흥(永興)에서 일으킨 의병부대에 14세의 소년으로 가담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용맹성을 발휘해 의병부대의 선두에 서서 일본군과 싸웠다. 노희태 의병부대가 분산되었을 때는 한 무리를 이끌고 지휘관이 되어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 등 선배 의병장들과 서간도로 넘어왔다. 서간도로 넘어온 의병들은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稧) 등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주 한인을 보호하는 자치활동을 벌이는 한편 국내에서의 항일 활동을 이어 가기 위한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3·1운동 발발 직후인 4월 15일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의병 출신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하였다. 초기 중앙조직의 간부는 도총재(都總裁) 박장호(朴長浩), 부총재 백삼규(白三奎),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총단장 조맹선,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등이었다. 본부는 류허현에 두고, 만주와 국내에 100여 개의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조직해 군자금 모집과 국내 진입 유격전을 펼쳤다. 의병 활동 당시의 용맹성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대한독립단의 암살대장에 임명되었다. 대한독립단은 출범 이후 내부의 갈등으로 왕정복고파들의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공화주의파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리되었다. 이때 박장호·백삼규·이웅해(李雄海)·전덕원·조맹선·김평식 등과 함께 기원독립단에 속하였다. 1920년 초 콴뎬현(寬甸縣)에 성립된 광복군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옮겨간 조맹선을 이은 이웅해 단장 휘하에서 암살대장의 직책을 이어갔다. 번시현(本溪縣) 사방태(四方台)에 근거지를 둔 암살대의 대원은 53명이었다. 대원들은 모젤권총으로 무장했고 싱징현(興京縣)을 비롯한 서간도 지역의 친일파를 처단하거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조대응(趙大能) 등과 함께 해이룽(海龍), 퉁화(通化), 싱징(興京), 푸순(撫順) 등지에서 일제 주구기관인 보민회(保民會)를 습격, 숙청하였다. 1922년 2월 기원독립단은 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과 통합 운동을 벌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성립시켰다. 이어 8월 환런현(桓仁縣)에서 대한통군부는 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광복군총영과 협의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되었다. 통의부는 남만주 한인들의 생계 지원과 자치를 이끄는 한편, 조국 광복을 위한 무장 활동을 전개한 독립군단으로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 민사부장 이웅해,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등과 의용군 사령관 김창환(金昌煥)이 주요 임원이었다. 통의부의 일원이 된 후 제5중대장에 임명되어 5개 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를 이끌었다. 카이위엔현(開原縣)·티에링현(鐵嶺縣) 등에 지방조직을 설치하고, 김창천(金昌天)·김광추(金光秋)·김일(金逸) 등을 소대장으로 임명해 카이위엔·싱징(興京)·둥펑현(東豊縣) 등 남만주 곳곳에서 친일파와 침략자를 척결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휘하의 2소대장 김광추에게 명하여 1924년 6월 푸순에서 밀정인 무순조선인민회서기(撫順朝鮮人民會書記) 정갑주(鄭甲周)를 처단케 하고, 펑톈(奉天, 현 선양(瀋陽))의 친일기관 보민회(保民會)를 만든 최정규(崔晶奎)를 습격 처단케 하였다. 1923년 중반에는 통의부 5중대장 직을 수행하면서 북만주 지방에 한국판의단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義烈團)과 연계해 소규모 유격전으로 큰 성과를 이루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단장 이동진(李東振), 검판장 김응섭(金應燮)과 함께 형무대장에 각각 선임되어 조직의 주요임원이 되었다. 또한 통의부의용군 5중대원 중 용맹성을 갖춘 50명을 선발해 판의단 단원을 구성하였다. 단원 10명을 1개 조로 5개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전원이 개인화기로 권총을 착용했으며, 목표물을 정해 무장 활동을 나갈 때는 암살용 폭탄 5·6개와 파괴용 폭탄 1·2개씩을 더 소지하였다. 판의단의 목표는 창춘(長春)에서 안둥(安東, 현 단둥(丹東))에 이르는 남만주 철도의 연선에 설치된 일제의 주요 기관과 영사관 파괴, 그리고 만주내 일제의 침략 수괴 및 친일 한국인 처단 등이었다. 그러나 판의단 계획은 1923년 하반기부터 일어난 통의부 내부의 갈등 때문에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통의부 제1중대장인 채찬(蔡燦)과 박응백(朴應伯)·김원상(金元常) 등은 1923년 말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더욱 활성화할 방안을 찾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사들과 협의하였다. 그 결과 만주 지역에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라는 독립군단을 성립시켜 오직 무장 활동만 전념한다는 안에 합의하였다. 1924년 봄 통의부 제 1·2·3 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를 분리시켜 이탈한 뒤 참의부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5중대에도 참의부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자, 그해 6월 5중대장으로 통의부를 이탈해 참의부에 가입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통의부 내 가장 강력한 중대였던 5중대의 이탈 과정에서 마찰이 생겨 1924년 7월 2일 통의부 잔류파의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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