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두
金炳斗1897. 10. 6 ~ 1985. 6.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
- · 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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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7년 10월 6일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기성면 정명리에서 아버지 김창국(金昌國)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연우(練宇)이고, 이명은 김욱이(金郁伊)이다. 1916년 9월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있다가 사태가 잠잠해지자 고향인 울진으로 내려갔다. 1919년 12월에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만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김영찬(金永燦)을 만나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신한청년』 등을 건네받고 임시정부 연락원이 되었다. 고향에 돌아와 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문서를 배포하며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1921년 1월부터 임시정부 외교원 홍우택(洪宇澤) 명의를 빌어 「상해 임시정부 직원록」·「사령서 등본」·「강제 명령서」·「강원도 수금원증」·「애국공채 가등서」 등의 문서를 작성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어 1921년 3월 울진군 평해(平海)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이른바 ‘공갈 협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서 만기 복역하였다. 출옥 후 한의사로 생활하면서 항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군가와 3·1운동 당시 일반인들이 부르던 독립가 등 20여 수를 기록한 수기를 남겼다. 수기는 17x22센티미터 크기의 40쪽 분량의 노트에 청색펜 글씨로 적혀 있다. 대구교도소에 복역 중 3·1운동 당시 경북 일대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때 그들과 함께 교도소 안에서 독립군가·독립가를 불렀고 당시의 심정을 필기도구가 없어 종이에 손톱으로 눌러 기록했다고 한다. 이들 기록은 1923년 출옥 후 대구의 한 여관에 들어가 기억을 되살려 펜으로 옮겨 적은 것이라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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