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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영

金萬榮

1887 ~ 192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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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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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大同)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대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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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7년경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坪面) 하단리(下端里)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6월경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린장현(臨江縣) 출장대(出張隊)의 대표였다. 따라서 1919년 3·1운동 전후 서간도(西間島)로 건너가 독립군단에 가입해 조직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21년경 서로군정서 의용군 린장현 홍토애(紅土崖)에 근거지를 둔 출장대 지휘관은 신광재(辛光在)였다. 신광재는 의용군 1중대장 채찬(蔡燦, 이명 백광운(白狂雲))과 함께 압록강변 국경지방인 지안현(輯安縣) 추피구(楸皮溝)에 암살대를, 그리고 홍토애에 출장대를 조직하였다. 이 두 특수부대에는 서로군정서 대원 중 최정예 요원들이 선출되어 수시로 국내 진입전을 전개하여 군자금 모집과 일제 기관을 기습 공격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신광재가 1921년 상반기 뜻밖에 병사하자, 신광재를 이어 출장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한편, 1922년 1월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南滿洲) 단체가 통합하여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결성하고 그해 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이때까지 서로군정서 의용군은 참여하지 않았다가 1922년 6월에야 서로군정서 의용군을 총괄 지휘하던 김창환(金昌煥)이 통합 참여를 선언하고 모든 의용군 대원들의 동참을 지시하는 고시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같은 날 제1중대 소속 간부들은 통합에 참여한다는 결의안(決議案)을 발표하자, 린장현 출장대의 대표로 결의안에 서명하였다. 통합 찬성 결의문 서명 후인 6월 19일 5명의 대원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하였다. 7월 6일 평북 강계군(江界郡) 공북면(公北面)에서 일본 경찰대를 만나 1차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1명의 대원을 잃었지만, 일본 경시 니노미야(二宮)와 순사 하라(原) 등 2명의 적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출장대는 계속 전진하며 친일 부호들의 집을 기습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평안남도 영원(寧遠)에서는 그곳 친일 부호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할 때, 친일 자위단원(自衛團員)들이 나타나 방해하자 2명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이곳에서 그때까지 모집한 군자금을 3명의 대원에게 맡겨 먼저 본부로 귀대시켰다. 자신은 나머지 1명의 대원과 모친이 있는 평양으로 가 잠시 만났다. 이어 대동강면(大同江面) 두간리(斗干里)의 지인 한영주(韓永柱)에게 안내를 부탁해 함께 나섰다. 그러나 이때는 일제가 출장대원을 체포하려고 평양을 포함한 평남 전체에 병력을 풀어 수색작업을 벌이던 중이었다. 결국 9월 9일 새벽 2시, 대동강 상류인 대동군 추을미면(秋乙美面) 법수(法水)에서 20여 명으로 구성된 평남경찰대를 만나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안내원 1명을 포함해 3명이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경찰대의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안내를 도와준 한영주도 다리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부하 대원은 피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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