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원
金鳳源1896. 2. 8 ~ 1945. 1.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흥무관학교
- · 서로군정서
포상 정보
- · 독립장(198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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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80) 1896년 2월 평안남도 강동군(江東郡) 원탄면(元灘面) 봉도리(鳳島里)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4월 만주 류허(柳河)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新民會) 인사들이 국외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관학교를 설치할 것을 결의한 후 1911년 여름에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1913년 신흥중학으로 교명을 개칭하였고, 1919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였다. 신흥강습소의 교직원으로는 교장 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이철영(李哲榮)·이광(李光), 교감 김달(金達), 학감 윤기섭(尹琦燮), 교관 및 교사 김창환(金昌煥)·이장녕(李章寧)·이갑수(李甲秀)·이규룡(李圭龍)·양성환(梁聖煥)·장도순(張道淳)·이관직(李觀稙)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 가운데에는 1898년 7월 1일 신식 무관 양성을 위하여 설치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이 다수 있었는데, 이세영(李世永)·김창환·이장녕·양성환·이관직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특별과의 교관으로서, 학생들에게 무관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들에게 무관 교육을 받았다. 1919년 8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김순일(金淳一)의 지휘를 받아 임시정부 재무총장(財務總長) 이시영(李始榮)으로부터 군자금 모금 사령(辭令)을 받고 부하 수명을 이끌고 평안도 지방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평남 대동군의 박덕종(朴德鍾) 집 등 여러 곳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 이를 김진준(金鎭俊)으로 하여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게 하였다. 1920년 9월에는 강동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김순일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던 1921년 1월 30일, 자신들을 일본 관헌에게 밀고한 강동군 고천면(高泉面) 도덕리(道德里)에 거주하는 김원봉(金元鳳)을 사살, 응징하였다. 이때 왕기서(王基西, 24세, 강동군 시족면(柴足面) 남경리(南京里)), 정석흥(丁錫興, 24세, 강동군 고천면(高泉面) 용천리(龍泉里))과 일제 경찰의 체포망에서 벗어났다. 붙잡힌 인물들은 김순록(金淳祿, 24세, 강동군 고천면 서리(西里))·김봉섭(金鳳燮, 29세, 강동군 원탄면(元灘面) 마산리(馬山里))·김태린(金泰麟, 강동군 원탄면 마산리)·이준린(李俊麟, 강동군 고읍면 맥전리)·김응정(金應廷, 강동군 고천면 동서리) 등이었다. 1921년 6월 강동군 원탄면 표대리(表垈里) 대동강 연안에서 대동경찰서(大同警察署)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의 죄명은 강동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군자금 1,612원을 임시정부에 송금한 일 때문이었다. 최선식(崔善植, 22세,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정석흥(丁錫興, 21세, 강동군 고천면 용천리)·김찬두(金贊斗, 25세,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박원국(朴元國, 22세, 강동군 원탄면 봉도리)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6년 4개월을 복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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