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준
金鳳俊1888. 1. 17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독립청년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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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3) 1888년 1월 17일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북면(北面) 명문리(明文洞)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봉준(金奉俊)이다. 1923년 9월 재만(在滿) 독립군단(獨立軍團)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별동대로 만들어졌던 천마산대(天摩山隊) 대원 최오산(崔午山)의 권유와 조력을 받아 조준룡(趙俊龍)·이지선(李芝善)·송여덕(宋汝德)·최운기(崔雲基)·조창호(趙昌浩) 등 20여 명과 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희천군을 기반으로 만주에서 파견된 독립군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자체적으로도 항일무장 활동을 전개하고자 만든 독립군단이다. 천마산대는 1920년 3월 평북 의주에 위치한 천마산을 근거지로 해 최시흥(崔時興)·최지풍(崔志豊)·박응백(朴應伯)·김상옥(金尙沃) 등이 주도해 만든 독립군단이다. 국내에서 성립된 독립군단이었으나 서간도(西間島) 콴뎬현(寬甸縣)에 근거를 둔 광복군총영의 인적·물적 지원을 받아 항일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총영에서 특파된 독립군까지 합해 대원 수가 많을 때는 2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총과 탄약 등 무기도 충분히 공급되었다. 무기와 유격술에 능한 독립군들을 충분히 공급받은 천마산대는 일제의 평안도 지역 침략기관들을 수시로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일제는 이러한 천마산대의 공격을 차단하려고 수차에 걸쳐 근거지로 파악된 지역을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1920년 10월부터 그 이듬해 5월까지 경신참변과 만행을 끝낸 일본군이 철수하자 서간도(西間島)를 포함한 남만주(南滿洲)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폐허가 된 독립군 기지와 한인 사회를 복구하고 독립전쟁을 이어가려고 통합 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1922년 8월 남만주의 17개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되었다. 광복군총영도 통의부로 통합되었다. 경신참변이 자행되던 기간에도 어느 정도 활동을 전개하던 천마산대는 본부인 광복군총영의 상황이 이같이 변하자 국내 활동이 점점 어려워졌다. 결국 1922년 하반기 국내의 근거지를 접고 남만주로 넘어가 통의부 의용군에 편입되었다. 천마산대는 대원들이 국내 무장 활동에 능숙하다는 특수성을 인정받아 5개 중대의 통의부 의용대 중 전원을 제3중대로 편제하였다. 따라서 최오산이 1923년 하반기 희천군에 와 독립청년단을 지원하고 관여했을 때는 통의부 의용군 3중대원이었을 시기였다. 하지만 3중대원들이 국내로 진입해 활동할 때는 여전히 천마산대 명칭을 사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오산은 함께 파견된 유격대원들과 희천군 북면 명문동에 있는 일제의 창참(倉站)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할 계획이었다. 유격대원들의 작전 계획을 듣고 동지 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목적지로 갔다. 1923년 9월 21일 밤, 유격대 및 청년단 단원 30여 명은 우선 명문리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선을 끊어 통신을 차단하였다. 그와 동시에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만한 몇 군데에 불을 놓아 일제 경찰의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기습 공격하였다. 불이 난 장소로 모두 출동하고 혼자 주재소를 지키고 있던 순사 한 명이 유격대의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순사를 처단한 후 유격대와 청년단원들은 창고를 부수고 무기들을 전리품으로 챙겨 나왔다. 주재소를 습격하는 동안 다른 한 조는 면사무소로 들어갔다. 다발적인 화재로 마을에 소동이 나자 면사무소 숙직자도 그곳으로 뛰어나가 텅 비었다. 유격대와 단원들은 금고를 찾아내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목표로 한 기습 작전이 끝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방화한 후, 현장을 벗어났다. 유격대원들은 화경면(化京面)을 다음 작전지로 택하였다. 화경면으로 향하는 유격대와 헤어져 단원들과 함께 귀가하였다. 유격대는 약간의 시일 차를 두고 작전을 전개하려고 강계군(江界郡)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9월 23일 유격대는 같은 군 입관면(立館面) 양피동(陽皮洞)에서 대규모의 일제 경찰대와 마주치고 말았다. 접전 끝에 두 명의 유격대원이 전사하고 6명의 대원이 붙잡혔다. 유격대가 피해를 입은 같은 날부터 첩보를 접수한 일제 경찰에 의해 청년단 단원들도 속속 붙잡혔다. 이때 명문동의 주민 50~60명과 함께 붙잡혔다. 조금만 불손하면 청년단 단원이라 하여 많은 수가 붙잡혔다. 이 중 청년단 단원으로 확인된 26명만 구속되고 나머지는 풀려났다. 일제는 붙잡은 청년단 단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하였다. 이 같은 고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신의주지방법원에 이어 평양복심법원 2심 재판정에서 단원들이 자신들이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재판정에서 단원들의 주장은 여론화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병로(金炳魯)를 비롯한 이기찬(李基燦)·김지건(金志健)·최창조(崔昌朝)·김형숙(金亨淑)·이희적(李熙迪)·한근조(韓根祖) 등 한국인 변호사들로 구성된 조선변호사협회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 변호인들의 주장에 의해 2심 재판정은 자신들 임의로 일본인 의사 오이카와(及川)에게 단원들의 신체를 검사하도록 하였다. 오이카와는 검사 후, 사람별로 5~11군데의 화상 또는 타박상이 있음을 적시해 제출하였다. 김병로를 비롯한 조선인변호협회 소속 변호사들은 고문의 부당성, 고문에 의해 허위 죄목이 인정된 1심 판결의 부당성 등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재판장은 변호사들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단원들의 형량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결국 1924년 7월 12일 동지 23명과 함께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다가 1927년 11월 15일 동지 17명과 함께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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