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조
金鳳祚1881. 3. 17 ~ 1924. 6.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1) 1881년 3월 17일에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현 포항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908년 8월 당시 경북 청하군(淸河郡) 남면(南面) 이장동(梨長洞)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장동은 배나무가 많은 마을로 현재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淸河面) 고현리(古縣里)에 속한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 강제 체결,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후기 의병들은 일제와의 직접적인 전투뿐만 아니라 친일파 처단, 군자금 징발, 악질 양반 처단 등의 활동도 동시에 펼쳤다. 이 무렵 곽덕산(郭德山)·곽이조(郭二祚) 등과 함께 흥해(興海) 지역을 대상으로 군수품 조달 활동을 하였다. 소속 의병부대는 활동한 시기와 지역으로 보아 산남 의병부대였던 것 같다. 이 시기 당시 경북 흥해·영천(永川)·청하 지역 일대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의병부대는 정환직(鄭煥直)·정용기(鄭鏞基) 부자(父子) 대장에 이어 최세윤(崔世允) 대장이 이끈 산남 의병부대였다. 한편, 곽덕산·곽이조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펴던 시기는 산남 의병부대 정환직 대장이 1907년 (음)11월 4일 영일군 북동대산에서 병사들에게 “개별적으로 식량과 복장 및 탄약을 구하여 관동(關東)으로 가서 그곳에서 만나자”라고 하고, 군사를 해산한 시기였다. 이에 그해 (음)11월 11일 밤 흥해군 북하면(北下面) 도항동(島項洞), 곧 현재의 포항시 북구 흥해읍(興海邑) 오도리(烏島里)에 사는 박곡강(朴曲江)의 집으로 가서 “우리는 의병이다. 군수금 징발을 위해서 왔다”라고 하면서 군수금 제공을 요청하여 50원을 모금하였다. 이어서 이틀 뒤인 (음)11월 13일 밤에는 흥해군 북상면(北上面) 벌제동(伐提洞), 곧 지금의 흥해읍 용천리(龍泉里)의 부호(富豪) 고낙삼(高洛三)의 집으로 찾아가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돈이 없어 2~3일 뒤에 제공하기로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가 그 뒤에 다시 찾아가 군자금 100원을 징수하였다. 또 11월 23일 밤에는 흥해군 북하면 흥안동(興安洞), 현재의 흥해읍 흥안리(興安里)에 사는 오토성(吳土城)의 집으로 찾아가 ‘우리는 의병’이라고 하고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가진 돈이 없어 4~5일의 여유를 주고 물러났다가 약속한 일자에 다시 찾아가 군자금 30원을 징발하였다. 1908년 2월 16일 오전 5시에 흥해군 북하면 백암동(白岩洞) 권기한(權紀澣)의 집에 찾아가 군자금을 요청하였으나 가진 돈이 없어 주찬(酒饌)만 대접받고 돌아왔다. 이러한 일들로 일제 경찰에 잡혀 1908년 8월 19일 이른바 강도죄로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