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윤
金錫允1877. 8. 23 ~ 1949.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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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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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7년 8월 23일 제주도 오라리(吾羅里)에서 아버지 김창규(金昌圭)와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중기 문신 명도암(明道菴) 김진용(金晉鎔)의 9세손으로 전통적 양반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근수(勤受)이며 호는 석성(石惺)이다. 이명은 김석명(金錫命)이다. 출가 후 법명은 종화(鐘華)이며 법호는 상운(祥雲)이다. 1887년 10세부터 제주 광양서재(廣陽書齋)에서 통감, 사서, 사략 등의 한문을 수학하였고, 1891년 금강반야경을 공부하였다. 불교에 심취하여 1894년 18세 때 전라북도 전주의 위봉사(威鳳寺)에서 출가하였다. 1898년 해남의 대흥사(大興寺)에서 내전(內典) 초등과를 수료하였고, 1898년 제주도로 귀향하여 광양서재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02년 1월 다시 경상남도 통영의 용화사(龍華寺)로 가서 사교과(四敎科)를 수료하고, 2월 귀향하여 1906년까지 교사 및 서당 훈장을 하였다. 1908년 여승 봉려관(蓬廬觀)을 도와 관음사(觀音寺)를 창건하였다. 1909년 제주 유림 고사훈(高仕訓, 일명 高承天·高景志)·이중심(李中心, 일명 李錫公)과 함께 제주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기우만(奇宇萬)의 의병 활동에 영향을 받았는데, 제주 출신으로 기정진(奇正鎭)에게 사사한 안병택(安秉宅)이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주도도 일본인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면서 분개하여 일본인을 모두 죽이고 한국의 구법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908년 고사훈과 함께 전답을 팔아 제주군 중면 이도리(二徒里) 광양동(廣陽洞)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고 화북리 황사평에서 비밀리 군사훈련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909년 2월 25일 이도리 광양동 조병생(趙丙生, 일명 趙仁官)의 집에서 고사훈·이중심·노상옥(盧尙玉)·김만석(金萬石)·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조병생 등 10명과 함께 모여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은 3월 3일, 거사 장소는 관덕정(觀德亭)으로 결정하고, 의병장에 고사훈·이중심을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을 맡았다. 이어 고사훈·이중심과 함께 「격문」 및 구체적 행동 내용을 담은 「통고사(通告事)」를 작성하고 당일 발송하였다. 「통고사」의 내용은 ‘각 마을의 이강(里綱)은 호적에 근거하여 모병하여 올 것이고, 선박의 출입을 금하며 총포·활·칼 등을 가지고 올 것이며, 화북에서 동쪽으로 돌아 용담에까지 제주도를 순회하도록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주성을 점령하기로 정하고 의병장 고사훈 등은 대정군 영락리·신평리·광청리·안성리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고, 이중심과 함께 중면을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제주성 안에서 호응할 예정이었다. 2월 28일 대정군 일대에서 모병한 약 200명의 의병이 광청리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명월리에서 격문을 순사에게 압수당해 거사가 발각되어, 3월 1일 의병장 고사훈이 광청리 민가에서 대정주재소 경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지도부를 잃은 의병은 와해되어 거사는 실패하였다. 1909년 3월 4일 광양에서 체포되어 광주(光州)로 끌려가 같은 해 4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제주 유림의 주선으로 항소하여 1909년 7월 대구공소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1909년 7월 관음사 서무로 취임하고, 1911년 관음사 내에 있던 해월학교 교사를 지냈다. 그러나 일제의 지속된 감시로 제주를 떠나 1916년 부산 범어사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였다. 이후 용화사를 근거지로 승려 활동을 하였다. 1934년경 제주로 돌아와서 범어사 제주포교소 월정암(月井庵) 주지가 되었다. 이 월정암은 1938년 제주 최초의 근대 선원으로 선학원의 제주분원인 제주선원 월정사가 되었다. 1939년 위봉사 제주 표선면 포교소 설립 및 주지, 1941년 위봉사 하례포교소 설립 및 주지, 1942년 관음사 평대포교소 주지, 1945년 관음사 소림원 주지를 역임하는 등 포교 활동을 통한 항일 의식 고취에 진력하였다. 1942년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는 양붕진 등의 보안법 위반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당했지만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여 방면되었다. 광복 이후 1945년 12월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를 통해 구성된 제주교무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46년 김녕리의 백련사(白蓮寺) 주지를 맡기도 하였다. 1949년 8월 25일 제주 오라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오동동 병문천 서쪽에 안장되었다가 2009년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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