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홍
金基弘1873. 2. 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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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73년 2월 2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수촌리(秀村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였고, 1919년 수안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설치된 천도교 수안교구는 1914년 대교구제가 실시되면서 황해도 동부 산악지대인 신계교구, 곡산교구와 함께 서흥대교구 산하에 편성되었다. 수안군의 만세 운동은 이러한 지역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곡산의 천도교인인 이경섭(李景燮)은 1919년 2월 28일 보성사(普成社) 사장이자 천도교 중앙총부의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과장인 이종일(李鍾一)로부터 황해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서흥군(瑞興郡)을 거쳐 수안군으로 온 이경섭은 3월 1일 저녁 수안교구의 평의원이자 공선원(共宣員)인 이종숙(李宗淑)의 집에서 수안 지역 천도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모임에는 수안교구의 교구장인 안봉하(安鳳河), 김영만(金永萬)·홍석정(洪錫禎), 홍순걸(洪淳杰) 등 전 교구장, 공선원인 나찬홍(羅燦洪)·최용식(崔鎔植), 전교사(傳敎師)인 한청일(韓淸一) 등이 참석하였다. 이날 회합에서 이경섭은 3월 1일을 기해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이니, 수안 지역에서도 독립선언서를 군내에 널리 배포하고 서울처럼 만세 시위를 전개하라는 이종일의 지시와 함께 독립선언서 100여 매를 전달하였다. 수안의 천도교 지도부는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로 하였다. 안봉하·홍석정·김영만·나찬홍·최용식·한청일·이영철(李永喆)·이달하(李達河)·나용일(羅龍日)·홍두옥(洪斗玉) 등은 3월 2일 시일(侍日)을 맞아 수안교구 교구실에서 회합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인들을 모아 3월 3일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과 헌병분대를 명도(明渡) 받을 것, 실행 방법은 홍석정과 한청일이 담당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 계획은 시행되기 전에 수안헌병분대에 탐지되었다. 이로 인해 3월 2일 오후 안봉하·김영만·최용식·나찬홍 등 수안 지역 천도교 지도부 11명은 교구실에서 붙잡혀 수안헌병분대로 연행되었다. 이때 검거를 모면한 홍석정·한청일·이영철 등은 당일 밤 수안 지역의 천도교 중심 인물들과 연락을 통해 2일 회합의 결정처럼 예정과 같이 3일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알렸다. 3월 3일 오전 6시경 수안면·대천면(大千面)·연암면(延岩面) 등에서 모인 홍석정·한청일·이영철·최양봉(崔陽鳳)·차제남(車濟南) 등 130~140명이 수안교구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수안금융조합 사무소를 거쳐 수안 헌병분대 앞마당까지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한국은 독립하였으며 자유와 공화정치는 대세임을 주창하였다. 또한 수안헌병분대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수안헌병분대장이 서울 본부에 명령을 받아야 하니 일단 물러갈 것을 요청하자, 강국보(康國甫) 외 1인을 대표자로 남기고 교구로 돌아 왔다.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1차 시위였다. 오전 11시경 교구에 모여드는 인원이 점차 증가하자, 이동욱(李東郁)·이재관(李在觀) 등 1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며 헌병분대로 행진하였다. 이때 시위 대열에 참가하여 헌병분대 앞에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며 진입을 시도하자, 일본 헌병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2차 시위였다. 오후 1시경 교구로 돌아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청일과 홍석정은 선두에 서서 150여 명의 교인을 이끌고 헌병분대 앞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헌병분대로 돌진하여 문간에 설치된 장애물을 제거하고 헌병대의 퇴거를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3차 시위였다. 이에 헌병대는 다시 군중을 향해 발포하였고, 시위를 주도하던 한청일과 홍석정 등이 사망하였다.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2차, 3차 시위에서는 9명의 사망자와 1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붙잡혔다. 이로 인해 헌병에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관할 재판소를 경성지방법원으로 지정하였다. 이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은 항소를 수리하지 않는다고 판결하여, 결국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1년 3개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본형 산입)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0년 조직된 임시군사주비단(臨時軍事籌備團)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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