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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영

金達泳

1857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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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달영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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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중화(中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중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6)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6) 1857년경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풍동면(楓洞面) 덕암리(德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63세로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3월 3일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祥原面) 신읍리(新邑里)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양 천도교구로부터 상원면에 위치한 중화군 천도교구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3월 2일 상원면 천도교인들은 기독교인 등과 함께 신읍리에 있는 상원경찰관주재소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상원면을 순시 중이던 중화경찰서장도 주재소에 갇혀버렸다. 오후 4시경 평양·진남포(鎭南浦), 황해도 곡산군(谷山郡)으로부터 지원군이 도착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경찰관을 구출한 후 시위 주모자를 체포하였다. 다음 날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은 검거된 사람들의 구출을 시도하였다. 3일 오후 2시 약 200명의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신읍리 읍내를 돌아다니다가 천도교구실로 몰려갔다. 여기에는 전날 시위로 체포된 사람들이 잡혀 있었다. 시위대는 군인·경찰들과 충돌하여 10여 명이 부상당하고 물러섰다. 오후 3시에는 신읍리 상원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다가 물러났다. 오후 4시 다시 주재소로 가서 군인과 경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는 평양으로부터 보병 18~20명을 증원하여 시위대를 해산하였다. 이날 시위로 체포되어 1919년 6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4개개월 형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자신은 한일 병합 이후 독립사상을 지니고 기회를 기다리던 중 독립선언서가 발표됨에 조선 민족의 의무를 이행하고자 만세를 부른 것이니, 처벌은 부당하다며 상고하였다. 하지만 7월 2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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