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상종

金象鍾

1848 ~ 1909. 2. 25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상종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의성(義城)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의성의진(의성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경기(景器), 호는 운산(云山)이다. 1848년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서변리(西邊里) 사촌(沙村)에서 아버지 생원 김수익(金壽翼)과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단, 다른 기록에 따르면 생년을 1847년 (음)11월 2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외조부 이수덕(李秀德)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증손자였다. 대지주 집안에서 성장하여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의성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저항하는 의병 항쟁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1896년 3월 3일 의성 지역의 유림과 함께 의성향교에서 창의에 대한 통문을 돌렸다. 3월 14일 향회에서 단망(單望)으로 창의장에 천거되자, 막중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시일 또한 급박하였기에 대장직을 수락하였다. 같은 해 3월 25일 의병장에 취임하고 중군장 권대직(權大稷), 선봉장 김수담(金壽聃), 소모장 김수욱(金壽旭), 관향장(管餉將) 김수협(金壽莢) 등 일가친척을 중심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농민들과 포수들을 병사부로 하는 의성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동생 김회종(金會鍾)은 아무런 직책도 없이 의병부대 운영에 참여하였다. 1896년 4월 2일 의성읍 남서쪽의 구봉산(九峰山) 전투에서 관군과 첫 전투를 치렀다. 여러 부장을 인솔하고 진두에서 지휘하였다. 오전 5시경부터 오후 1시경까지 치른 전투에서 관군 2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퇴각하던 관군에 의해 읍내가 불태워지는 화를 입었다. 전투 후 전열을 정비하고 의성군 옥산면(玉山面) 황산(黃山)에 머물렀다. 같은 해 5월 10일 대구와 군위의 관군이 대규모로 몰려온다는 정보를 듣고 옥산면 금학리(金鶴里) 고무실(鈷鉧谷)로 진을 옮기고자 선발대를 파견하고 잠복하면서 대기하였다. 밤부터 이튿날까지 큰 비가 내려 화약은 진흙이 되고 옷과 장비가 젖어 못쓰게 되었다. 이 틈을 탄 대구의 관군이 공격해와 빗속에서 격전을 치렀다. 이 황산전투에서 장졸 및 병사 2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다음 날 관군들은 그의 고향인 사촌(沙村)으로 내려가 마을을 불태웠다. 황산전투에서 패한 의성 의병부대는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청송 의병부대와 연합을 도모하려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같은 해 5월 12일 의성 사곡면(舍谷面) 누실(累實)에 유진하였다가 화목(和睦)을 거쳐 다시 신시(新市)에 주둔하였다. 이 무렵 의성 의병부대의 요청으로 경기도에서 내려온 김하락(金河洛)의 이천 의병부대와 심성지(沈誠之)의 청송 의병부대가 청송 안덕면(安德面) 문거(文居)에서 연합을 이루었던 것 같다. 같은 해 5월 14일 관군이 대구에서 청송 화목으로 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천 의병부대는 부대를 분산하여 적극적으로 대비한 반면, 의성 의병부대는 앞선 전투의 피로로 관망하고 있었고, 청송 의병부대는 아예 안덕면 근곡(根谷)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날 12시경 관군이 안덕을 향해 성황현(城隍峴)으로 들어오자 매복해 있던 이천 의병부대가 일제히 공격하여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잠시 물러났던 관군은 다시 의병을 공격해왔다. 청송 안덕면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연합 의병부대는 이 전투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연합 의병부대가 감은리전투에서 승리하고 문거(文居)로 물러나 5월 15일 아침 군사를 점검해 보니 연합 의병부대 측은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의성 의병부대는 80여 명 중 16명만 남아 있었다. 이때 이천 의병장 김하락에게 의성으로 회군하여 합진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하락도 이에 동의하고 문거를 출발하였다. 같은 해 5월 17일 청송 의병부대와 결별하고 이천 의병부대와 함께 의성군 사곡면(舍谷面) 운곡(雲谷)에 유진하면서 영을 내려 군사를 모집하였다. 5월 18일 연합 의병부대는 본진을 의성군 금성면(金城面) 수정사(水淨寺)로 옮겨 대오를 정비하였다. 새로 모집된 군사 100여 명과 함께 의병부대를 재편성하여 의기를 떨쳤다. 같은 해 5월 20일 남쪽 산운리(山運里) 쪽에서 관군 200여 명이 몰려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의병부대는 부대를 나누어 비봉산과 그 주위에 매복하고 의성 의병부대는 남현(藍峴)을 지켰다. 정오 12시경 수정동으로 들어오는 관군을 공격하자 청로역(靑路驛)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관군을 추격하여 가음면(佳音面) 순호리(蓴湖里)의 안산 등지에서 적 수명을 사살하여 격퇴하고, 날이 저물어 수정사로 회군하였다. 5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다시 공격해온 관군과 산운천변(山雲川邊) 전투에서 관군 5명을 사살하고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5월 26일 이천 의병부대가 퇴군하려고 비봉산을 넘으려 할 때 갑자기 경병(京兵) 관군이 공격해왔다. 일기마저 거센 바람으로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구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의성 의병부대만으로 대적하기가 어렵게 되자, 동생 회종의 부축을 받으며 비봉산에서 의성 금성면 이곡(梨谷)을 거쳐 춘산면(春山面) 사미(思美)에 도착한 뒤 일단 해산을 명하였다. 그 뒤 동해안 지역으로 피신하여 재기를 꾀하였으나, 의병 해산 조칙(詔勅)이 내려지자 장졸들을 이해시켜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같은 해 9월 29일 장졸들이 계속 투쟁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모든 군기를 수습하여 의성 관아에 보내고 의병부대를 완전히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다시 상소(上訴)를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기의병장인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과 같이 예안(禮安)에 모여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서울로 올라가 대궐 앞에서 상소 운동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활동상에 대하여는 분명하지 않으나, 1909년 진중(陣中)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