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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배

金寶倍

1873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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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보배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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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高敞)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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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김영백의진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3) 1873년경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부안면(富安面) 중흥리(中興里) 난산(卵山) 마을에서 태어났다. 1909년 당시 37세였던 것으로 보아, 1873년생으로 추정된다. 의병 활동 당시 고향은 흥덕군(興德郡)에 속하였다. 1909년 4월 김영백(金永伯) 의병부대에 참여한 후 5월 무렵까지 고향인 흥덕과 고창 일대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장 김영백이 1907년 10월 전라남도 장성(長城)에서 창의한 의병부대는 전남의 광주(光州)와 장성을 주요 활동지역으로 삼았다. 1908년부터는 전북 일대까지 활동 범위를 확장해갔다. 특히 1908년 7월부터 흥덕과 고창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인 이래, 1909년 2월 이후에는 일본군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전북 일대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러한 상황인 1909년 4월경 김영백 의병부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고향인 흥덕과 인근의 고창에서 김영백 의병부대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합류한 1909년 2월부터 4월 사이에는 흥덕과 고창 일대에서 지속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의병부대에 합류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09년 4월 김영백 의병부대는 흥덕의 일동면(一東面, 현 고창군 흥덕면) 구수교(九水橋) 일대와 일남면(一南面, 현 고창군 신림면(新林面)) 유점리(鍮店里) 근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의병부대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대원으로서 전투에 참여하였을 나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아울러 일본군 헌병대의 추격으로 인해 의병부대의 은신처가 필요한 상황을 배경으로, 고향인 흥덕과 고창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데 앞장선 것으로 유추된다. 의병장 김영백의 지휘 하에 25명의 부대원과 함께 총기 10정을 휴대하고 주민들에게 양식과 짚신 등을 징발하여 의병부대의 주둔을 도운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7월 16일 장성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패해 큰 타격을 입었고, 1909년 9월부터 전개된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으로 이어지면서, 부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결국 고부경찰서 순사대의 추격을 받던 중 1909년 10월 4일 붙잡혔다. 동향(同鄕) 출신으로 같은 부대원이었던 이범술(李凡述)과 함께 폭동죄로 기소되었다. 10월 1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재판에서 김영백의 폭동 행위 방조의 사실이 인정되면서, ‘폭동의 종범(從犯)’으로 지목되었다.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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