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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태

金錫泰

1874. 5. 21 ~ 1937.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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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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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갑산(甲山)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갑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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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광복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74년 5월 21일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회린면(會麟面) 중리(中里)에서 출생하였다.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이전에는 군(郡) 참사(參事)로 관료생활을 하였다. 1920년 11월 재만(在滿) 독립군단(獨立軍團)인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파견원 박형열(朴亨烈, 이명 박정빈(朴正彬))과 이치룡(李致龍)의 권유를 받아 갑산분단(甲山分團) 설립의 책임을 맡았다. 같은 달 22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중리 구장(區長) 박태화(朴泰華) 외 몇 명의 찬동을 얻어 대한광복단 갑산분단을 조직하였다. 이후 갑산분단 단원들과 단원 모집에 나서 회린면 최고 자산가인 김좌봉(金佐鳳, 74세)과 군수를 역임한 김우봉(金佑鳳, 70세)을 가입시켰다. 단원들이 모집되자 확정된 인원 하에 갑산분단 임원을 선임하였다. 간부진의 일원이 되어 분단장 김좌봉과 함께 부분단장에 임명되었다. 그 외 검찰(檢察) 박태화, 평의원(評議員) 박원희(朴元熙), 재무과장 김우봉 등이 임명되었다. 체제 정비 후 40명에 가까운 분단원을 확보하고, 갑산군 내 3개의 분지단(分支團)을 설립하였다. 갑산분단 단원들은 「선유문(宣諭文)」 및 「사령서(辭令書)」 등을 소지하고 친일파 및 일제의 밀정 색출에 나섰다. 군자금청구서·의연금청구서 등을 활용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도 전개하였다. 대한광복단 제령(制令), 대한광복단 지단 단정(團程) 및 통칙(通則), 광복단 입단증 등을 지참하고 단원 확보를 위한 노력도 지속하였다. 이러한 활동 사실이 일제 경찰에 노출되어 약 120명에 달하는 갑산분단 단원이 3차례에 걸쳐서 체포되었다. 1921년 2월 중순 갑산분단 제1분지단(단장 金來源) 단원들이 혜산진경찰대에 검거되었다. 제2분지단(단장 李愼在) 단원들 또한 중평장(中坪場)경찰대에 체포되었다. 4월 상순에는 갑산분단 단원들도 붙잡혔다. 이때 단원들과 함께 체포된 후, 경찰서에 감금되어 신문을 받던 중 단원의 도움을 받아 탈주하였다. 곧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西間島) 창바이현(長白縣)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광복단 지단(支團)에 그간의 정황을 설명하였다. 이후 국내 분단이 아닌 서간도의 지단에서 활동하였다. 대한광복단은 1919년 구한말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를 역임한 이범윤(李範允)을 추대하여 단장에 임명하고 김성륜(金聖倫)·김성극(金星極) 등이 중심이 되어 성립한 독립군단이다. 북간도(北間島) 왕칭현(汪淸縣)에 본부를 두고, 안투현(安圖縣)과 창바이현에 분단 및 지단을 설치하였다. 특히 창바이현에는 8도구(道溝)를 비롯해 12·17·20도구 등 여러 지역에 분단을 설치하였다. 창바이현은 한국의 혜산과 접한 국경지방으로 국내 진입이 비교적 수월했기에 여러 개의 분단을 설치하고 많은 독립군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왕칭현의 광복단 본부 병력은 1920년 10월 일본군 대병력이 서북간도를 침입했을 때, 독립군 병력을 이동하다가 허룽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에서 독립군 연합부대에 가담해 청산리대첩을 세우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본부 병력은 대첩 후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했다가 북만주(北滿洲)로 돌아와 활동을 이어갔다. 창바이현으로 넘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1년 6월경, 광복단 지부는 태극단(太極團) 지부(支部)를 흡수, 통합하였다. 통합된 단명은 광복단으로 명명했으며, 두 독립군단이 확보하고 있던 근거지를 합해 다시 3개의 구(區)로 나누어 각 구에 분단을 설치하였다. 이때 제2구 분단장에 선임되었다. 제2구 분단은 태극단 지부 소재지였던 창바이현 17도구 달계덕리(達鷄德里)에 진영을 설치하고, 간부진으로 분단장 외 총무 김동준(金東俊), 재무 이종흘(李鍾屹), 서기 조성극(趙成極) 등이 있었다. 약 20명의 통신원과 직접 전투에 참여할 모험대원 24명 등 간부 포함 50명이 넘는 병력과 소총 5정과 권총 20정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광복단이 이 같은 진용을 갖추기 이전 창바이현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들은 독립군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참여한 독립군단은 광복단을 비롯해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흥업단(興業團)·태극단·대진단(大震團) 등 5개였다. 연합회는 원활한 작전을 위해 통신 및 유격대 파견 등을 서로 협의하여 수행하고자 만든 결성체였다. 광복단과 태극단이 모두 가담했기에 통합 이후에도 연합회의 구성체가 되어 타 독립군단들과 상호 협력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후 안투현에 있는 지단과 연결해 작전을 세운 뒤, 국내 진입 유격전을 추진하였다. 1921년 9월 초, 20명의 부하를 함남 갑산군 보혜면(普惠面)에 있는 포태산(胞胎山) 방면으로 진입시켰다. 그달 중순경에는 직접 10명의 부하를 이끌고 선발대가 진출한 포태산으로 향하는 것으로 국내 진입전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창바이현 내 다른 독립군단 지휘부와 협의해 농민회(農民會)를 조직하였다. 농민회는 창바이현에 근거지를 둔 각 독립군단을 후원하는 이주 한인 단체로, 한인 마을에서 독립군의 양식은 물론 군복 등을 생산해 이를 독립군단에 제공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농민회는 독립군단 진영이 있는 곳마다 조직되었다. 한편 창바이현을 근거지로 한 여러 독립군단은 1921년 하반기부터 더 효율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수행하려고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흥업단(興業團)은 대진단(大震團) 지단을 편입해 하나로 만들었고, 1922년 2월 흥업단과 대한독립군비단이 통합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광복단 일부, 광복단에 합류하지 않은 태극단 잔여 세력이 국민단과 통합해 광정단(光正團)을 설립하였다. 광복단원들이 대거 이탈해 광정단에 합류하는 상황에서도 광복단 지단에 남아 1924년부터 1925년 초까지 창바이현 광복단 지단장으로서 조직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지단장과 함께 지휘부로 총무 김진무(金振武), 지방대장 김병욱(金炳郁), 경호과장 이현범(李現範), 외교과장 김원삼(金源三), 통신과장 노창열(盧昌烈), 모연대장 김영후(金永厚) 등이 임명되어 약 90명의 독립군 병력을 유지하며 항일 활동을 이어갔다. 1924년 11월 24일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 전체를 아우르는 군정부(軍政府)인 정의부(正義府)가 성립되어 광복단 소속의 젊은 독립군들이 정의부에 가담하면서 단세는 더욱 약화되었다. 1925년 이후부터는 60세 가까운 노령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무장활동을 접고 지단이 있는 안투현에서 이주 한인 사회를 지도하며 거주하던 중 1937년 5월 1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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