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하
金錫河1896 ~ 1930.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1)
관련 사건
- · 정의부 군민대표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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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1) 1896년 평안북도 의주군 광평면(光坪面)에서 출생했다. 이명은 김효성(金孝晟)이다. 가족관계 및 성장 과정을 밝혀줄 자료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다.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에 의하면, 3·1운동 후 서간도(西間島)로 넘어가 송암(松菴) 오동진(吳東振)이 콴뎬현(寬甸縣)에 설립한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에 가입해 활동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측의 보고문서인 「독립운동에 관한 건(압록강 방면)」과 「관전현하 불령선인」에 의하면, 서간도로 망명한 의병 계열의 인사들이 1919년 4월 15일 설립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콴뎬현 청산구(靑山溝)에 설치한 지방조직의 제1주무(主務) 또는 검찰(檢察)직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양측의 기술 중 한쪽이 틀릴 수 있으나, 동시에 두 단체의 조직원이 되어 활동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광제청년단이나 대한독립단은 1919년 3·1운동 직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대한독립단의 경우 본부는 류허현(柳河縣)이었으나 설립과 동시에 지방조직망을 갖추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콴뎬현에 거주하며 광제청년단 조직원이자 대한독립단 지방조직원으로 활동했을 수도 있다. 광제청년단은 얼마 후, 만주와 국내의 여러 청년단과 연합해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성립하였다. 1920년 초에는 다시 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한족회(韓族會)·대한독립단 등과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직속의 광복군(光復軍)을 만들었다. 광복군은 부속기구로 참리부(參理部)·사령부·군영(軍營)을 설치하고, 특수부대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편성하였다. 광복군총영은 1922년 8월,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南滿洲) 지역에 근거지를 가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 등 17개 단체와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통의부는 남만주의 광활한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삶을 지원하는 자치활동을 펼치며, 의용군을 조직해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통의부가 성립되자 의용군의 유격대 간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통의부 내에서 제8중대 1소대장, 8중대장, 6중대장 등에 선임되어 항일 전선의 최일선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남만 지역 17개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통의부의 설립 목적은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파괴되고 폐허가 된 독립군 근거지와 한인 사회를 재건하고 독립전쟁을 효율적으로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3·1운동 후 서북간도에 설립된 수십 개 독립군단(獨立軍團)의 독립군들은 압록·두만강을 넘어 한국 내로 진입해 일제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일제는 독립군 기지와 이를 지원하는 한인 사회를 초토화시키고자 1920년 10월 약 2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일본군 대병력의 만행으로 10여년이 넘게 피땀 흘려 이룩한 독립운동 기지와 한인 사회는 초토화되었다. 또한 3,000명이 넘는 독립군과 한인이 살해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다시 조국 광복에 매진하고자 모두의 힘을 합친 통의부를 성립시켰다. 따라서 통의부에 가담한 독립운동자와 단체는 이전의 이념이나 노선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새로운 규정과 체재에 복종하기로 약속하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성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 10월, 광복 후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신봉하는 전덕원(全德元)계와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양기탁(梁起鐸)계가 서로 대립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결국 무력충돌까지 일으켜 전덕원계가 의군부(義軍府)라는 단체를 만들어 나갔다. 이어 1924년 중반에는 채찬(蔡燦, 일명 백광운(白狂雲))·최석순(崔碩淳) 등이 임시정부 인사들과 논의한 뒤, 임시정부 직속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켜 분리해 나갔다. 채찬과 함께 참의부로 간 병력은 통의부 의용군 제1·2·3·5 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獨立小隊)였다. 참의부 세력이 이탈하자 의군부 병력이 나갈 때보다 훨씬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은 통의부 지휘부는 당황하였다. 상당 기간 양측의 대립이 심각하게 이어졌고, 무력 충돌까지 발생해 통의부 대원이 참의부의 참의장이 된 채찬을 살해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같은 상황이 일어나자 1924년 6월 17일, 김창룡(金昌龍)·이규성(李奎星)·현일천(玄日天)·김창헌(金昌憲)·김국주(金國柱) 등과 임시장교회의를 개최해 남아있는 통의부 독립군들을 안정시키고 정비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해 합의된 내용을 서약문으로 발표하였다. 서약문의 내용은 통의부를 지키며 적극적으로 광복 사업에 매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서약을 지키기 위해 실행해야 할 12개 사항을 결의문으로 작성하였다. 결의사항은 남아있는 병력의 부대편성 및 주둔지 책정, 잔여 무기 장부 작성, 무기 구입 계획안 마련 및 구입 등이었다. 이들 업무는 각 장교들이 나누어 수행하기로 했는데, 무기구입 책임자로 선정된 정이형(鄭伊衡)과 현일천이 업무 수행 중 사고를 당해 추진할 수 없게 될 경우 그를 대신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4년 8월경, 지안현(輯安縣) 유수림자(楡樹林子)에 주둔하고 있을 때, 싱징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설치된 중앙조직 본부에 있던 군사위원장 오동진으로부터 서신이 왔다. 내용은 통의부 의용군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장 활동에 대해 날짜별 전투 장소와 그 성과를 열거했으며, 향후 우리 독립군이 나아갈 방책을 제시하였다. 오동진이 이런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는 것은 많은 병력이 참의부로 옮겨 가고 난 뒤 그 뒷수습을 하기에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군사부위원장의 이 같은 신임을 받으며, 동료 지휘관들과 의용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빠져나간 중대는 새로 만들지 않고, 4·7·8중대와 헌병대를 편성하였다. 재정비된 의용군의 간부는 4중대장 홍기주(洪基柱, 임명 후 곧 변절), 7중대장 이규성, 8중대장 김석하, 헌병대장 김창헌 등이었다. 의용군을 정비해 이같이 진용을 갖추고 있을 때, 통의부 중앙조직의 간부들은 주변의 민족운동계 지도자들과 새로운 통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념이나 노선이 달라 이탈한 의군부나 참의부 계통의 인사들은 어쩔 수 없지만, 남만주에 흩어진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뭉쳐야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가 탄생하였다. 통의부를 비롯해 서로군정서·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고본계(固本稧) 등 8개의 독립군단 및 단체가 통합에 합의해 정의부를 성립하였다. 정의부는 성립 초기 본부를 류허현에 두고, 하얼빈부터 액목현(額穆縣)을 거쳐 북간도까지 선을 그어 그 이남의 남만주를 관할 지역으로 해, 이주 한인을 대상으로 자치활동을 펼치는 한편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중앙조직에는 입법·사법·행정기구를 갖추고 산하에 의용군을 편성한 군정부(軍政府)의 체제를 갖추었다. 정의부가 성립되자 의용군 제8중대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초기 정의부 의용군의 조직은 통의부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단지 6중대만 새로 편성되어 4개 중대와 헌병대를 구성하였다. 여러 단체가 통합하다보니 인원 및 재정 등이 일시에 정리되지 않아 짜임새 있게 구성하지 못하였다. 이어 1925년 5·6월경에는 8중대 1소대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9월에 조직이 개편되면서 제3중대장과 헌병대 대장에 선임되었다. 이 9월 개편부터 정의부 의용군은 제1중대부터 5중대까지 5개 중대와 헌병대를 편성하는 안정감 있는 무장 조직 체제를 갖추었다. 독립군 또한 400명을 넘겼고, 무기 또한 충분하게 보유하였다. 그러한 조직에서 중대장과 헌병대장에 선임되었다는 것은 의용군 내에서 위상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남만 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체로서 잘 나가던 정의부는 1925년 후반 큰 분란을 맞았다. 정의부를 성립시키고자 일을 추진하던 기간, 그리고 성립 후 1년이 넘게, 이 단체의 주도 세력들은 임시정부와 심각한 갈등관계에 있었다. 이유는 채찬·최석순 등이 임시정부 직속의 참의부를 성립시켜나갈 때 통의부 측 인사들은 임시정부 인사들이 분열을 부추긴다고 성토했고, 임시정부 또한 『독립신문』을 통해 통의부 지도자들을 공격하였다. 그 같은 상황이었는데, 1925년 중반 임시정부의 이유필(李裕弼)과 오영선(吳永善) 두 사람이 남만에 와서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인사들을 만났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를 국무령(國務領)제로 변경해 정의부의 실질적 지도자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을 추대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을 행정위원들이 동의했고, 추후 입법기관인 중앙의회에 알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의원들은 크게 분노하며 행정위원회에 대해 불신임을 결의했고, 행정위원회 또한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중앙조직의 행정과 입법기관이 해체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본 의용군 지휘관들과 각 지방조직 대표들이 1926년 1월 24일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구성하였다. 이 대표회에 의용군 제5중대 대표로 참여하였다. 군민대표회가 구성될 시기에는 5중대의 중대장에 선임되고, 헌병대는 안홍(安鴻)이 대장을 맡았다. 군민대표회는 1월 26일 시국을 수습하기 위한 성명서(聲明書)를 발표하고, 기존의 헌장을 폐지하고 58개조의 새로운 ‘정의부헌장’을 발표하였다. 중앙행정위원을 다시 선출하고, 중앙의회 의원 수를 확대시켜 이주 한인들의 민의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하였다. 군민대표회 이후에는 계속 제5중대장을 맡다가 1927년 2월 사령관 오동진이 의용군의 체제를 강화하고자 사령부를 확대할 때 경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오동진 사령관은 행정 및 입법기관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견고한 의용군을 만들고자 하였다. 따라서 사령부 내에 부관과 경리·사무원을 따로 임명하고, 헌병대를 폐지하고 유격대를 설치하였다. 부관은 제1중대장이었던 이태형(李泰馨)과 바로 이전 증설된 6중대의 중대장이었던 안홍을 임명하고, 의용군 자체적으로 재정을 운용할 수 있도록 경리를 두었다. 독립운동 기관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것은 내부의 신의가 있어야 가능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부터는 독립군 지휘관으로 상당한 신망을 받고 있음을 말해준다. 정의부 의용군 내에서의 위치가 이와 같았으므로 자연 따르는 독립군도 많았다. 중대원들로 직접 유격대를 구성해 한국 내로 진입시켜 일제 침략기관을 공격하고 친일의 무리를 척결하도록 지시하였다. 1925년 7월 초에는 이진무(李振武)를 대장으로 해 김광진(金光振)·홍학순(洪學淳) 등 7명으로 유격대를 편성해 평북 지역으로 진입시켰다. 유격대장으로 임명한 이진무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애꾸눈이었지만, 민첩하고 용맹한 행동대장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흑선풍(黑旋風), 일목장군(一目將軍)이란 별명을 가졌다. 이들 유격대는 철산군(鐵山郡) 차련관(車輦館)으로 진입해 주류제조회사인 영성상회(永成商會)를 습격해 군자금 63원을 모금하고, 일제의 차련관주재소를 습격해 일본인 순사 4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이진무를 대장으로 한 4인조 유격대를 편성해 평북 구성군(龜城郡)으로 진입시켰다. 이들은 구성군 신시주재소(新市駐在所) 부근에서 일제 경찰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또 1927년 7월에는 홍학순·장기천(張基千) 등 4인 유격대를 편성해 의주군 가산면(加山面)으로 진입시켰다. 유격대는 그곳 방산동(方山洞)에 거주하는 일제의 밀정 강영화(姜榮化)와 계승호(桂承浩)를 체포해 총살하였다. 1926년 후반, 한국 독립운동계에는 전 민족을 하나로 뭉치기 위한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27년 초 만주로 이어져, 같은 해 4월 15일부터 4일간 지린현(吉林縣) 신안둔(新安屯)에서 52명의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 대표들이 모여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양세봉(梁世奉)·이웅(李雄) 등과 함께 정의부 군대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최초의 회의는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으나 만주 독립운동계 지도자들은 이후 민족유일당 성립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만주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유일당은 이루지 못했으나, 북만주에는 1928년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가 성립되고, 남만주에는 1929년 4월 1일 통합군정부인 국민부(國民府)가 성립되었다. 이들 단체 지도자들은 이후 북만에서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독립전쟁을 수행할 한국독립군을 성립시키고, 남만에서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조선혁명군을 성립시켰다. 남만의 경우 국민부가 행정을 이끌고 조선혁명당이 정당의 역할을 하는 구조가 되었다. 즉, ‘이당치국(以黨治國)’의 형태를 갖춘 것이다. 조선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8월 8일 향후 조직의 노선을 결정하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에서는 당을 지배하는 국민부의 존폐 문제가 집중 논의되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통합에 가담한 여러 단체 출신의 대표자 23명으로 구성되었다. 위원들은 향후 체계적인 조국 광복 사업을 위해 국민부를 존치하자는 그룹과 결국 민중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으니 해체하자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이 대립되는 두 가지 의견은 결국 합치하지 못해 양측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국민부를 해체하자는 그룹에 가담하였다. 두 파로 나뉜 세력의 갈등은 결국 무력 충돌까지 발생하여, 국민부 존치파는 그 해 9월 20일 해체파인 주하범(朱河範)·김창룡(金昌龍)·김이택(金利澤) 등 3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반대파인 주마골(朱馬骨) 일파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운명하고 난 뒤 그를 따르던 부하 이진무는 대원들을 이끌고 주마골을 체포해 총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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