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필
金舜弼187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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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8) 1879년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이천면(伊川面) 남대리(南垈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總部)에서 파견한 안상덕(安商悳)에게 독립선언서 15장을 전달받은 천도교인 이광선(李光善)은 1919년 3월 2일 천도교 이천교구장 이춘호(李春浩)와 논의하여 동면 탑리(塔里)에 있는 천도교 교구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때 독립선언서 2매를 받아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천도교의 주도로 4월 4일부터 8일까지 이천군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다음 날인 3월 3일에는 천도교 평강교구에서 보낸 장선경(張善慶)으로부터 이춘호가 독립선언서 15매를 받았다. 이날 이춘호는 김형구(金瀅九)와 이경선(李京善)에게 독립선언서 15부를 전달하며 이천 군내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겼다. 이천의 만세 시위는 4월 4일에 낙양면 지석리(支石里)에 있는 시장에서 처음 일어났다. 지석리 시장은 강원도와 황해도의 접경 지역으로 교역이 활발한 곳이었다. 지석리 시장의 시위는 김병하(金炳河)·김응제(金應濟)·김이순(金利淳)·이여종(李呂鍾)·이두영(李斗榮)·김혁근(金赫根) 등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였다. 천도교인들은 김응제의 집에서 태극기와 격문 등을 제작하며 시위를 준비하였다. 4월 4일 오후 3시 경에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자 5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호응하였다. 지석리 시장에서는 다음 날인 4월 5일에도 60여 명이 모여 시위를 계속하였다. 새벽 5시경 지하리(支下里)에 있는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만세를 불렀다. 결국 헌병 3명과 육탄전을 벌이다가 헌병이 쏜 총에 5명이 즉사하였다. 4월 4일과 5일 지석리 시장의 시위에 자극받아 이천면 장날인 4월 6일에 또다시 천도교인에 의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천면 시위는 이천면 남좌리(南佐里)와 용포면(龍浦面) 창전리(倉田里)에서 준비하였다. 남좌리에서는 박재곤(朴在坤)과 이원모(李元模)가 주동하였다. 4월 6일 남좌리 주민들은 박재곤의 집에서 만든 대형 태극기를 들고 시장까지 행진하였다. 용포면 창전리에서 김연옥(金淵玉)·정용규(鄭龍奎)·손은국(孫銀國)이 시위를 준비하였다. 4월 6일 창전리의 시위 군중 100여 명은 마을에서 봄 고사를 지낸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여 비석리(裨石里)를 거쳐 탑리 시장에 들어와 만세를 불렀다. 4월 7일에는 다시 천도교인인 이석조(李錫祚)와 박영목(朴永穆)이 주동이 되어 이천면 주민들을 이끌고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였다. 8일에도 이천면 남좌리에 사는 천도교인 박응규(朴應奎)·박종규(朴宗奎)·이형모(李亨模) 등이 나서 이천면에서 시위를 펼쳤다. 3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헌병분견소와 경찰서로 몰려가서 만세를 불렀다. 이천면의 시위가 고조되는 가운데 4월 8일 천도교 교구실에서 판교면(板橋面) 명덕리(明德里)에 사는 김창하(金昌河)에게 “이번 한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의 중심은 천도교도이고 이 운동이야 말로 멀지 않아서 반드시 성공할 것이므로 각자가 운동자금으로 10원 이상을 제공하여 크게 이 독립운동의 원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라고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하였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해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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