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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문

金舜文

1892 ~ 1920.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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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순문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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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성진(城津)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성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동제회
  • · 광복단
  • · 대한독립기성총회
  • · 간도 대한국민회
  • · 의군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용정 3.13만세시위
  • · 경신참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2년경 함경북도 성진군(城津郡) 학성면(鶴城面) 어산리(漁山里)에서 출생하였다. 한편 자료에 따르면 1880년 출생이라는 의견도 있다. 1912년 북간도(北間島)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 난양동(南陽洞)으로 이주하여 최석화(崔錫和)와 함께 한인 마을을 개척하는 한편, 이란거우 남양동교회를 건립하고 후에 이 교회의 장로에 서임되었다. 북간도 이주 한인 사회 초기 개척자 중의 한 명이다. 이주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해 1914년 동제회(同濟會)의 이란거우 지회장(支會長)에 임명되었다. 동제회는 북간도 최대의 한인 자치 및 독립운동단체인 간민회(墾民會) 산하의 대동협신회(大同協新會)와 청년친목회(靑年親睦會)가 통합해 성립된 결사체였다. 이 단체의 간부진은 회장 조희림(曹喜林), 부회장 남공선(南公善), 총무 유진구(柳震九), 인사부장 장기영(張基永), 편집부장 계봉우(桂奉禹), 의사부장 김하석(金夏錫) 등으로 당시 북간도 독립운동을 이끌던 인사들이 거의 참여하였다. 이 단체의 활동 목표는 청년 학생과 동포의 민족정신 함양,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집중적으로 군사교육을 시키는 것과 함께 남녀노소 한민족 모두가 군인 정신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었다. 즉, 항일 무장 활동을 충실히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동제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같은 시기 명동학교(明東學校) 교사가 되어 2세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식을 거행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이에 북간도지역 민족운동자들도 김약연(金躍淵)과 정재면(鄭載冕)을 연해주로, 강봉우(姜鳳羽)를 국내에 파견해 민족운동자들의 움직임을 파악하였다. 2월 18일에는 옌지현 쥐즈가(局子街)에 있는 박동원(朴東轅)의 집에서 북간도 지역 민족운동자 33인이 모여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 구춘선(具春先)·이홍준(李弘俊)·박경철(朴敬喆)·김영학(金永學)·고평(高平) 등과 함께 참석하여 광복단(光復團)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울러 실무적 업무를 수행할 간도조선독립운동의사부(間島朝鮮獨立運動議事部)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먼저 연해주에 파견된 김약연 등이 그곳의 민족운동자들과 합의한 독립선언서 작성 및 선언을 의사부가 주도해 실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어 향후 미주·베이징(北京)·톈진(天津)·상하이(上海)·서울·평양·러시아 연해주 등의 독립운동자들과 연락을 취해 수천 명의 단원을 모집하고 상호 연계해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해 가기로 결의하였다. 이 같은 준비를 하고 있던 중, 1919년 3월 7일 국내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북간도 지역 민족운동자들은 연해주와 연계해 추진 중이던 독립선언식 대신 국내의 독립운동에 호응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3월 13일 정오, 룽징(龍井) 북쪽 서전대야(瑞甸大野)라 불리던 곳에 3만 명 이상의 한인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회장 김영학의 주도 하에 조선독립축하회를 거행하고 만세 시위에 돌입해 룽징 시내를 지나 일본영사관을 향해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군경대의 발포로 이 시위에서 17명이 희생당하였다. 시위대가 해산된 후, 3월 중순경 북간도 민족운동자들은 간도조선독립운동의사부를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로 변경하고 그 뒷수습을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성총회는 쥐즈가에 본부를 정하였고, 회장은 구춘선, 부회장은 마진(馬晋)이었다. 그 아래 의사(議事)·재무·교섭·편집·통신·경호부 등이 편성되었다. 유예균(劉禮均)·김병흡(金秉洽)·김약연·정재면·강구우(姜九禹) 등 14명과 함께 의사부 부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부상자들을 치료시키고 희생자들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등 3·13 시위의 뒤처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같은 해 3월 말, 북간도 민족운동자들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기성총회를 간도조선국민의회(間島朝鮮國民議會)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이 단체의 명칭을 다시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로 바꿨다. 기성총회에 이어 구춘선이 회장에 선임되어 옌지현 추엔양시앙(春陽鄕) 하마탕(蛤蟆塘)에 본부를 둔 총회를 설치하고, 북간도의 옌지·허룽(和龍)·왕칭(汪淸) 등 3개 현(縣)을 아우른 후, 이를 다시 중부(中部)·동부·서부·남부·북부 등 5개 구역으로 나누어 지방총회를 설치하였다. 지방총회는 구역을 나누어 제1, 제2 지방회가 설치되었는데, 쥐즈가 지방을 관할하는 중부지방총회 제2지방회 사교부장(社交部長)에 임명되어 회장 강구우와 함께 본격적 독립운동을 수행하였다. 1919년 9월 이후 임국정(林國禎)·윤준희(尹俊熙)·최이붕(崔以鵬, 이명 최봉설(崔鳳卨))·한상호(韓相浩) 등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단원들과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웠다. 철혈광복단 단원들은 이듬해 1월 4일 룽징의 동량어구(東良於口)에서 조선은행 회령지점 현금수송 마차를 급습해 15만 원의 군자금을 획득하였다. 이 사건의 계획 단계까지만 참여하고 40대라는 연령 등을 감안 해 거사에는 함께 하지 않았다. 단원들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 돈으로 무기를 구입할 계획이었다. 이들 단원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집에 들렀을 때, 향후 계획을 함께 논의한 후 이튿날 연해주로 보냈다. 간도대한국민회는 총회와 지방조직 등 방대한 기구를 편성하는 것과 함께 산하에 안무(安武)를 사령관으로 한 국민회군(國民會軍)이라는 독립군단(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간도대한국민회가 국민회군을 조직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 북간도와 서간도에는 여러 독립군단이 조직되었다. 이들 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은 유격대를 결성해 국내 진공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독립군의 활동에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간도에 근거지를 둔 한국 독립군을 초토화하고자 하였다. 이 계획에 입각해 일제는 그해 10월 2일 친일 마적을 매수해 그들의 훈춘(琿春)영사관 분관을 습격하게 한 날조된 사건을 만든 후, 마적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약 2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일본군 대병력은 서북간도의 독립군 근거지와 이주 한인 사회를 사방에서 포위하며 공격해 들어왔다. 이러한 정보를 사전 입수한 독립군들은 일시적 피전책(避戰策)을 택해 상호 연락을 취한 후 근거지를 떠나 백두산록 서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들이 독립군 병영에 도달했을 때 독립군들은 이미 떠나고 없는 상태였다. 상황을 파악한 일본군들은 한인 사회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해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이란 대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시기 왕칭현에 근거지를 둔 의군단(義軍團)의 서무 일까지 맡고 있었기에 일본군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 분명했으나 40이 넘은 나이에 먼 길을 이동하기 어려워 이란거우의 자택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1920년 10월 18일경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같은 달 24일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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