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은
金洙銀186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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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65년경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월일은 알 수 없으나 이범윤(李範允)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전개한 의병 활동으로 1909년 경성공소원에서 재판받을 당시 판결문에 45세로 기재된 것을 볼 때, 186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주소는 함경북도 회령군 고령진(高靈鎭) 대안 간도(間島)였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군의 강제해산으로 전면적인 의병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908년 1월부터 후기 의병은 활동이나 규모면에서 계속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직접적인 원인은 일제가 1908년 6월 15일에서 7월 10일까지 북부 지역 의병을 소탕할 목적으로 시행한 ‘북부수비구대토벌작전’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직적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때문에 다수의 의병들은 근거지를 러시아와 만주 지역으로 옮겨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1908년 7월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이범윤이었다. 이범윤 의병부대의 안중근(安重根)·전경무(全敬務)·엄인섭(嚴仁燮) 등의 진영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범윤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1902년 북변간도관리사로 간도로 이주한 농민들을 보호하러 간도로 파견되었다. 이범윤은 이들을 보호하려고 사포대를 조직하고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측에 가담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패전하자 간도에 대한 일본군의 간섭이 잦아지고 1907년에는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가 생겨 간도에서의 구국운동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항일 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러시아령 연해주로 건너가 무기를 구입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국내 침공 작전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1908년 이후 국내 의병 항쟁이 점차 북상하여 함남·함북 일대로 확산하자 이범윤은 창의회를 중심으로 광범한 모금·모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많은 동포가 여기에 호응하여 30만 원에 달하는 성금이 들어오고 4,000여 명의 청년이 연해주 연추(煙秋, 현 추카노프카)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연추를 후방기지로 삼아 국내 침공 작전을 개시하였다. 1908년 7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한 의병의 규모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10월에 이르러 대규모의 기습 공격이 감행되었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받은 뒤 국경지대를 거점으로 동지 70여 명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 함북 회령 홍의동(洪儀洞)을 거쳐 같은 군 송산동(松山洞)·멱사동(覓沙洞)에 이르기까지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였다. 이러한 국내 진공 작전 중 붙잡혀 1909년 7월 12일 함흥지방재판소에서 유형 5년을 받고 항소하였다. 같은 해 9월 13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고초를 옥고를 겪었다.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주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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