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연
金汝蓮1899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통군부
- · 대한통의부
- · 참의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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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1) 1899년경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참면(站面) 서부동(西部洞)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경 압록강을 넘어 만주(滿洲)로 갔다. 후일 “1921년 봄 김창석(金昌錫)의 권유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한통군부는 1922년 2월 설립된 독립군단이고, 대한통의부는 1922년 8월 통군부가 발전적으로 개편된 조직이다. 1922년 5월 조화선(趙化善)·김재수(金在洙) 등 6명의 대원과 국내로 진입해 평북 강계군(江界郡)을 돌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6월 13일 오전 1시에는 강계군 입관면(立舘面) 화양동(化陽洞) 신관참(新關站)에 있는 일본인 토구다 지쇼(德田二松)가 경영하는 벌목작업장으로 가서 사무실과 창고에 불을 놓아 전소시켰다. 한국의 삼림을 피폐시키고 목재를 약탈해가는 이곳은 일본인 관리들이 거주하는 장소였다. 남만주(南滿洲) 지역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탄생한 통의부의 설립 목적은 경신참변(庚申慘變) 후 독립운동자들의 힘을 일치시켜 파괴된 한인 사회와 독립군 기지를 복원하고, 더 효율적으로 항일 무장 활동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17개 단체가 통합한 통의부 구성원들은 각자의 이념과 노선을 무시하고 오직 조직이 추구하는 목표만을 따르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성립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은 1922년 10월 의병 출신의 복벽주의(復辟主義) 계열과 공화주의 계열 간에 갈등이 생겼다. 갈등은 곧 무력 충돌로 이어져 이듬해 2월 복벽주의계가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만들어 이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1923년 하반기에는 더욱 강력한 항일 무장 활동을 주장하는 무장파들이 통의부의 핵심 간부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들 무장파들은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한 끝에, 1924년 상반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켜 또 다시 이탈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통의부 측은 1924년 중반부터 다시 통합 운동을 벌여,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에 가담한 단체는 통의부를 비롯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 등 8개였다. 1924년 (음)4월 중 참의부(參議府) 소대장 차천리(車千里)가 구성한 유격대의 일원이 되어 평북 강계군으로 진입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즈음 참의부 지휘부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한·중 국경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참의장 채찬(蔡燦, 이명 백광운(白狂雲))은 2중대 소속 소대장 장창헌(張昌憲)에게 유격대를 구성해 사이토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창헌은 7명의 대원들로 유격대를 구성해 1924년 5월 19일 평북 위원군(渭原郡) 마시탄(馬嘶灘)의 압록강변에서 경비선을 타고 통과하던 조선총독 사이토 일행을 공격하였다. 독립군의 공격이 퍼붓자 경비선은 쏜살같이 속력을 내며 빠져나가 사이토의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식민지 한국은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다고 호언한 사이토는 독립군의 공격에 혼비백산해 그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 사건 후, 모든 일제의 무장 세력에 초비상사태가 내려졌다. 사이토 공격 후 장창헌은 이응서가 이끄는 유격대와 합류하였다. 차천리가 지휘하는 유격대 또한 강계군 곡소면(曲沼面)에서 합류해 10여 명의 유격대가 되었다. 이들 유격대와 함께 1924년 6월 21일 밤, 자위단원(自衛團員) 백봉기(白鳳琦)가 사는 곡소면 쌍부동(雙富洞)으로 이동하였다. 자위단원이란 주재소·면사무소·금융조합 같은 일제의 침략 및 수탈 기관을 독립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친일파 그룹이었다. 그러나 유격대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백봉기는 나가고 없었다. 유격대는 그의 아들 백봉빈(白鳳濱)과 백영빈(白永濱)을 처단하고 집에 불을 놓아 친일파에 대한 응징의 메시지를 남겼다. 이 작전 후 유격대는 다시 작은 단위로 분리해 각각 작전을 위해 분산하였다. 그런데 사이토가 공격받은 후 일제 군경에 비상이 내려지자 친일파들까지 준동하였다. 2명의 대원을 데리고 본대에서 분리한 장창헌은 1924년 (음)6월경 평북 강계군 종서면(從西面) 황청동(黃淸洞)에 진입해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을 알아본 옆 마을 황서동의 친일파들이 일제의 경찰서에 밀고하였다. 6월 13일 황청동에 있던 장창헌 유격대 대원들은 밀고를 받은 일제 경찰의 대병력 작전부대의 공격을 받아 전원 사망하였다. 만주 본부를 떠난 지 두 달이 넘었지만, 귀대하지 않고 차천리 유격대의 일원으로 계속 작전을 펼쳤다. 자위단원 백봉기의 집을 공격한 후 일시 분산했던 이응서와 차천리 유격대는 1924년 7월 상순 다시 합류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13일 오전 1시 강계군 공북면(公北面) 향하동(香河洞)의 친일파 김용준(金龍俊)의 집을 기습 공격하였다. 김용준과 그의 처 김응녀(金應汝) 및 어머니 신씨(申氏)를 끌어내 처단하였다. 이어 같은 마을의 친일 부호 김봉서(金鳳瑞)를 처단하려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독립군의 공격을 두려워한 김봉서는 집을 소작인 최종희(崔宗熙)에게 대여해주고, 자신은 강계 읍내로 피신해 살고 있었다. 이에 유격대는 김봉서 소유의 주택 3채를 모두 소각하고 마을을 떠났다. 이 같은 친일부호 처단 작전을 끝내고 유격대는 본부로 귀대하였다. 그런데 본부에 도착하자 장창헌 등 3명의 대원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8월 중순 다시 유격대가 구성되자, 차천리가 지휘하는 7명의 유격대 중 일원이 되었다. 차천리 유격대와는 별도로 소대장 이응서도 7명의 대원을 지휘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국내로 진입해 합류하기로 하였다.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한 두 유격대는 강동군(江東郡)에서 합류한 뒤, 이미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던 참의부 대원 배상대(裵相大)·송선호(宋善鎬) 등 5명을 추가해 19명으로 부대를 꾸렸다. 이들은 1924년 8월 22일 밤, 강계군 고산면(高山面) 연상동(延上洞)으로 이동해 친일파인 김오규(金五奎)와 그의 차남 김병수(金幷洙)의 집을 불태웠다. 유격대는 다시 강계군 종서면(從西面)으로 이동 중 손용준(孫用俊)·박학빈(朴學彬) 등 두 대원을 합류시켰다. 그리고 8월 29일 종서면 황서동(黃西洞)에 도착해 소대장 장창헌 등 3명의 대원을 밀고한 이정호(李貞浩)와 그의 장남 이경현(李庚鉉), 김성로(金成魯)·한승항(韓承恒) 등 4명을 붙잡아 마을의 상여 도구 보관창고로 끌고가 모두 처단하였다. 이 작전을 수행하고 난 뒤 유격대는 다시 작은 규모로 조를 구성해 분산하였다. 이때 김석홍(金碩弘) 등 4명과 한 조가 되었다. 9월 27일 밀정들이 활보해 독립군에게 큰 피해를 주는 강계군의 고대동(古臺洞)으로 가서 계영팔(桂永八)·윤정설(尹禎卨)·계용희(桂龍熙) 등 3명의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이어 10월 6일에는 위원군 석포동(石浦洞)에서 밀정 이찬봉(李贊鳳)을 처단하였다. 그 후 1928년 4월 동지 최봉조(崔奉祚)와 다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4월 26일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에서 목선을 빌려 신의주에 도착해 어시장(魚市場)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어시장에서 일제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받았다. 의주군(義州郡) 광성면(光城面) 산중까지 피신하였으나 쫓아온 일제 경찰대와 격전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일제의 경찰에게 정의부 소속이라 진술한 까닭에 당시 신문에는 정의부의용군 사령관 오동진(吳東振)을 구출하려고 파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였다. 1929년 4월 22일 신의주의 여관에서 체포된 이응서와 함께 재판을 받았다. 1931년 7월 2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같은 해 12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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