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운
金汝雲1876 ~ 미상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4)
관련 사건
- · 북간도 왕청현 3.1독립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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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4) 1876년경에 태어났다. 출생지와 가족관계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만주(滿洲)로 건너간 시기 및 경위 또한 알기 어려우나, 1919년경 북간도(北間島) 왕칭현(汪淸縣) 태평구(太平溝)에 거주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왕청현 나자구(羅子溝)에서 결성된 의사부(議事部)의 평의원(評議員)이 되었다. 이 단체는 1919년 2월 18일 옌지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서 성립된 간도조선독립운동의사부(間島朝鮮獨立運動議事部)의 왕칭현(汪淸縣) 지부였다. 간도의사부는 북간도 최대의 만세 시위운동인 3·13 룽징(龍井)시위 직후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로 변경되었다. 기성총회는 다시 간도조선국민의회(間島朝鮮國民議會)로 바뀌었다가, 1919년 5월 17일 북간도 최대 독립운동 단체인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 즉 대한국민회가 되었다. 대한국민회는 이후 옌지(延吉)·허룽(和龍)·왕칭현(汪淸縣) 등 3개 현(縣)의 한인 사회를 총체적으로 관할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룽징 3·13 시위 후인 3월 16일, 구춘선(具春先)·김영학(金永學) 등 당시 북간도 지역의 민족운동을 이끌던 지도자 17명이 왕칭현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왕칭현 지역 지도자들에게 다량의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이를 한인 마을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3월 19일 약 1,000명의 한인을 집합시켜 대규모 독립축하회를 거행하였다. 그는 구춘선·김영학·장봉태(張鳳澤) 등과 연설을 통해 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독립축하회가 끝난 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될 대표들의 활동 자금을 위한 모금이 진행되었다. 의사부의 서기 이성열(李成烈)과 500원씩 기부하였다. 1919년 (음)11월경에는 황병길(黃炳吉)이 결성한 의용군에 가담하였다. 황병길은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러시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한 이래 줄기찬 국외독립운동을 이끌어 온 인물이다. 그는 약 5,000명의 독립군을 모집해 활발한 국내 진입전을 전개해 침략자 일제를 물리칠 계획을 세웠다. 1919년 말까지 약 1,300명의 독립군이 모집되었다. 황병길은 이들 독립군의 무장을 위해 1919년 (음)11월 하순 연해주에서 다량의 무기를 구입해왔다. 북간도로 들여온 이들 무기는 각 의용군 대원의 집에 일시 보관하도록 했는데, 황병길의 지시를 받고 훈춘현(琿春縣) 호로봉(胡芦峯) 서작동(西作洞) 자신의 집에 소총 7정을 보관하였다. 서작동은 소련 연해주와 접한 훈춘현의 국경지방이었는데, 1919년 하반기 왕칭현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유추된다. 3·1운동 후 서북간도 지역에 성립된 수십 개의 독립군단(獨立軍團) 소속 독립군들은 수시로 국내로 진입해 유격전을 펼쳤다. 인적·물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1920년 8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이란 독립군 토벌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10월부터 약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켜, 이듬해 4월까지 3,700명에 가까운 한인을 살해하고, 170여 명을 체포해 끌고 갔으며, 70여 명의 부녀를 강간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란 만행을 저질렀다. 한인 학살이 자행되는 동안, 훈춘현의 산속으로 숨어들어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였다. 일본군이 철수하고, 1921년 6월 일제가 첩자를 이용해 조사한 보고서에서는 훈춘현 춘화향(春化鄕) 태평구(太平溝)에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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