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로
金聲魯1885. 3. 27 ~ 1922. 4.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흥무관학교
- · 경학사
- · 한족회
- · 서로군정서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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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85년 3월 27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에서 아버지 김병욱(金旭秉)과 어머니 재령 이씨載寧李氏 이수갑(李壽甲)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맹옥(孟玉), 호는 중산(一山)이다. 이명으로 김종훈(金宗勳)을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열여섯 살까지 한학을 공부한 뒤 측량학교(測量學校)를 졸업하고, 1911년 3월 30일 1회생으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졸업하였다. 협동학교 교장 김병식(金秉植, 1856~1936)을 비롯하여 신민회(新民會)에서 초빙한 교감 박태훈(朴泰薰)과 교사 이관직(李觀稙, 1883~1972)·박준서(朴濬緖)·김진황(金振璜) 등으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았다. 1910년 12월 말 김대락(金大洛, 1845~1914) 등이 만주로 망명한 뒤, 1911년 8월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오산학교(五山學校)가 있는 평양을 거쳐 1912년 3월 21일 퉁화현(通化縣) 하니허(哈泥河)에 도착하였다. 김동삼(金東三, 1878~1937)·김형식(金衡植) 등과 함께 하니허에 제2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망명 생활에서 얻은 피로(疲勞)와 수토병(水土病), 거기에 아버지 김병욱이 위독하단 소식에 7월 25일 귀국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뒤 아버지의 병환을 돌보다가 1915년 협동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한문·역사 등의 강의를 담당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6년 2월 부친 김병욱이 사망하여 장례를 치른 뒤, 1918년 대상을 치렀다. 그리고 1919년 3월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7년 만에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1919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제4회로 졸업하였다. 이즈음 이름을 김종훈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부민단(扶民團)이 한족회(韓族會)로 확대·발전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김동삼의 후임으로 서무사장(庶務司長)에 선임되었다. 그해 4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한족회의 군정부(軍政府)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되면서 정무청(政務廳) 내무사(內務司)의 서무과장(庶務課長)을 맡아 한국 교민들의 생활 안정에 노력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 이후 대종교(大倧敎)의 포교사(布敎師)로 위장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국내로 파견되었다. 곧이어 1921년 초 국내로 잠입하던 제2진이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중 고향에서 멀지 않은 임하(臨河)에서 정주경찰서 형사대와 안동 지역의 경찰에 체포되었다.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기소되어 의주지청의 1심 재판을 받은 뒤 1921년 6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혹독한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1922년 4월 30일 아들 김시린(金時麟)이 지켜보는 가운데 38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동아일보』는 1922년 5월 4일 「김성로(金聲魯) 옥중(獄中) 장서(長逝)」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시신을 고향인 안동으로 운구하여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금지와 강압 때문에 사회장으로 치르지 못하고 평인장(平人葬)으로 치렀다. 묘는 천전2동 속칭 광산(匡山)에 있었는데, 광복 후 천전1동 비리곡(飛離谷)으로 이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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