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길
金成吉187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양윤숙 의진(양윤숙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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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73년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좌부면(左部面) 하절리(下節里)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중 1908년 양윤숙(楊允淑)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일본에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등 국권 상실 위기가 현실화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갔다. 호남에서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국권 회복을 위한 거의(擧義)를 결의하였다. 이후 거의가 본격화되자 유림뿐 아니라 일반 평민 출신도 이에 호응하면서 의병부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을사늑약 직후 호남에서 최초로 거의한 것은 최익현(崔益鉉)을 중심으로 한 태인 의병이다. 을사늑약에 분노한 고창 출신의 유생 고석진(高石鎭)과 진안 출신의 유생 최제학(崔濟學), 전(前) 낙안군수 임병찬(林炳贊) 등이 중심이 되어 거의를 계획하는 한편 충청남도 정선에 있던 최익현을 모셔와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특히 임병찬은 최익현의 위임을 받아 군무(軍務)를 총괄하며 각 지역에 통문을 보내 의병모집과 군수물자 수집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창의격문을 발한 뒤 공식적으로 거의하였다. 무성서원에서 창의를 선포한 태인의병은 정읍·순창·옥과·곡성·담양 등지를 순회하면서 의병의 세력을 확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양윤숙은 태인의병이 정읍을 지나 순창으로 들어왔을 때, 여러 동지와 함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태인의병은 몇 차례 소규모 전투에서 일본군을 압도하며 무기와 문서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전주를 거쳐 서울로 북상한 뒤 일본 세력과 외교적 담판을 통해 몰아낼 것을 최종적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두드러진 전투 활동은 없었다. 또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기 직전 의병장 최익현이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라며 의병을 해산했기 때문에 큰 무력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비록 태인의병은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한 지 열흘 만에 해산하였지만 이후 호남 지역의 의병 결집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태인의병의 영향을 받아 임실의 강재천(姜在天), 광양의 백낙구(白樂九), 남원의 양한규(梁漢奎), 운봉의 박봉양(朴鳳陽), 창평의 고광순(高光洵), 능주의 양회일(梁會一) 등이 각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거의하였다. 양윤숙은 태인의병 해산 후 순창으로 돌아와 은신하던 중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과 고종의 강제 퇴위 등 국권이 상실되는 위기에 처하자 이듬해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의 뒷산인 회문산(回文山)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도총독 양윤숙을 필두로 조직된 의병부대는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하였다. 양윤숙 의병부대는 1908년 (음)8월 향관(餉官) 서기협 지휘하에 순창군 무림면 화암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으며, 9월에는 중군 최산흥(崔山興)이 구림면 국화촌에 주둔한 남원수비대를 기습하여 전공(戰功)을 올렸다. 1909년 (음)1월에는 후군 이국찬(李國贊)이 12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면 죽전리의 순창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다. 1909년 (음)2월에는 교련관 한자선(韓自善)이 병력 30명을 인솔하고 회문산 기슭 산내리에서 순창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양윤숙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동료 의병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22일 밤 십장(什長) 최학천(崔學天)의 지휘하에 동료 의병 8명과 함께 전북 순창군 무림면(茂林面) 남정동(南井洞)에 이르러 모씨(某氏)의 집에 들어가 뒤 동장(洞長) 권경순(權敬順)을 불러놓고 ‘우리는 의병인바 군자금이 필요하니 차출하라’라고 총으로 위협한 뒤 50냥을 수집하였다. 같은 해 7월 18일 밤에는 최학천 등과 함께 순창군 호계면(虎溪面) 호계리(虎溪里)에 거주하던 임내익(林乃益)의 집에서 ‘우리는 의병인바 노비(路費)를 차출하라’고 총으로 위협한 뒤 20냥을 모집하였다. 이어서 최학천 등 동료 의병 2명과 함께 순창군 호계면 정산리(鼎山里)에 거주하고 있는 김처동(金處同)의 집에 들어가 ‘우리는 의병인바 군수금을 차출하라’라고 총으로 위협한 뒤 군자금 20냥을 모집하였다. 이와 같이 양윤숙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최학천 등과 함께 순창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체포되었다. 재판에 회부되어 1909년 11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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