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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배

金順培

1899. 5. 17 ~ 1970.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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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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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麗水)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여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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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6)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6) 1899년 5월 17일 전라남도 여수군(麗水郡) 율촌면(栗村面) 조목동(稠木洞)에서 태어났다. 전남 광주군(光州郡)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에 거주하면서 동네 고용인(雇傭人)으로 일하던 1919년 3월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기독교 목사가 되어 1939년 3월경 여수읍(麗水邑) 교회에서 신도(信徒)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의 부동교(不動橋) 아래 장터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시작된 만세 시위운동에 합류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에서 광주의 기독교인들과 사립 숭일학교(崇一學校) 및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양림리에 모여 광주천(光州川)을 타고 내려왔는데, 여기에 참여하였다. 당시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최병준(崔丙俊) 등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고 쓴 경고문(警告文)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시위 군중은 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한 뒤 시내의 큰 사거리로 행진하였으며, 저녁에는 경찰서를 향해 행진해 나갔다. 이때 일제 경찰과 헌병들이 폭력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한편, 주도자들을 현장에서 검속(檢束)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서, 같은 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4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기독교에 전념하여 목사로 활동하였다. 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順天老會)의 대비생(貸費生)으로 평양(平壤)의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문과(文科) 및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평양신학교 재학 중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말세학(末世學)』 등을 공부하고 그 사상에 심취하였다. 이후 전남 여수읍교회(麗水邑敎會)의 목사로 재직하던 1939년 3월경, 광본경일랑(光本慶一郎) 등 신도 100여 명에게 “현재는 말세(末世)로서 기독(基督)의 재림(再臨)이 멀지 않았고 재림에 의해 현존세계는 멸망하고 기독은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여 신자(信者)와 불신자(不信者)를 심판하는데, 신자만 천국의 백성이 되고 불신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재림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신앙을 독실하게 하여 재림에 의해 건설되는 이 천국의 백성이 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설교를 하였다. 이는 일제 식민 통치의 종말을 말세론에 견주어 설교함으로써 교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려는 일환이었다. 이와 같이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또 다시 검거되었다.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도 계속 목사로 활동하였으며, 1970년 8월 12일 순천에서 사망하였다. 1997년 10월 16일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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