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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현

金世鉉

1895. 3. 20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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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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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삼수(三水)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삼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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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6) 1895년 3월 20일 함경남도 삼수군(三水郡) 호인면(好仁面) 화전리(樺田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득현(金得鉉)이다. 아홉 살 때 부모와 함께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바이현(長白縣) 16도구(道溝)로 이주하였다. 창바이현 16도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20년 (음)10월경 유상노(劉尙魯)의 권유로 대한독립군비단(군비단)에 가입하였다. 군비단은 1919년 5월경 백두산록 서남 지역 압록강변에 위치한 창바이현 17도구에서 함경도의 항일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다. 이들은 국내보다는 효과적이고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벌이려고 함경도와 마주한 창바이현으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초기에는 무장 투쟁을 위해 단원 모집과 조직 정비에 주력하다가 그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태걸(李泰杰) 등 7명을 파견하여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체계적인 독립군단으로 발전하였다. 가입할 당시 군비단은 중앙 본부와 지단의 체계를 갖추고 수시로 단원을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보내 진공 작전을 벌였다. 대부분 함경도 출신인 군비단원은 국경 지방의 지리에 밝아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군비단에 가입한 즉시 경호원에 임명되어 문서의 왕복, 기타 연락 사무에 종사하였다. 1920년 (음)12월 20일 군비단 총무 윤덕보(尹德甫)의 명령을 받고 삼수군 읍관면(邑館面) 수차리(水遮里)에 사는 친일 밀정 김치항(金致恒) 외 2명을 창바이현 16도구 소덕수리(小德水里) 북쪽 밀림으로 데려가서 처단하였다. 한편, 1920년 10월 일제의 이른바 간도토벌 뒤에도 압록강변의 독립군단들이 끊임없이 국내 진공 작전을 벌였다. 일제는 압록강 연변에 일본군과 경찰을 증강하고 수시로 한국주차군 제20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국경수비대와 연합하여 독립군 토벌을 강화하였다. 이에 창바이현에 근거지를 가진 독립군단들은 강화된 일본군의 토벌에 맞서 효과적인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해 통합 운동을 벌였고, 군비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비단은 다른 독립군단과의 통합 과정에서 이념과 노선 문제로 분열되어, 일부는 흥업단과 통합하여 대한국민단을 결성하였다. 나머지 일부는 북간도의 대한국민군사부와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사회를 결성하였고, 1922년 3월 태진단·태극단 등과 통합하여 대한광정단(광정단)을 조직하였다. 본부를 창바이현 17도구에 두었고 단장은 윤덕보였다. 1926년 1월 윤덕보의 명령으로 단원 33명과 함께 러시아령 이만으로 가서 그곳의 교관 강모(姜某)에게서 군사 훈련을 받고 다시 창바이현으로 돌아와 활동하였다. 광정단 단장이었던 윤덕보의 명령을 따른 사실에서 군비단에서 대한국민단, 그리고 광정단으로 옮겨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향인 삼수군으로 돌아와 그동안 행적을 숨기고 농사를 짓다가 1928년 2월 혜산진경찰서에 붙잡혔다. 1928년 3월 2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및 살인죄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28년 칙령 제270호에 의해 징역 3년 9개월로 감형되어 1931년 5월 13일 가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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