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봉
金京奉1908. 10. 15 ~ 1957. 4.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운동자연구회
- ·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
- · 노농연구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제주적색노조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3) 1908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제주면 삼도리(三徒里)에서 태어났다. 1923년 10월 제주공립보통학교(濟州公立普通學校) 5학년을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大阪)의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29년 9월 귀국하였다. 이후 구우면(舊右面) 한림리(翰林里)에서 양화점(洋靴店)을 운영하면서 1930년대 대표적 항일운동인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사회주의자 이익우(李益雨) 등의 지도를 받아 공산주의에 공감하여 비밀 조직에 가담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3월 제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출옥한 양두옥(梁斗玉)·김두진(金斗珍)·홍계표(洪季杓) 등의 동지들을 위한 출옥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그 자리에서 “당신들은 악법 때문에 장기간 형무소에 구속되어 고통을 겪었으나, 낙담하지 않고 점점 용기를 고무하고 구우면 내에서 전위 투사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라고 격려하였다. 1932년 5월경 한림리 자택에서 양병시(梁秉時)·장한호(張漢鎬)·문석빈(文錫彬) 등과 함께 한림리에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기관을 결성하기로 협의하였다. 일단 전체 책임자를 맡아 다른 지방 동지들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독서회를 조직하여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6월 양병시·장한호와 함께 운동자연구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전(全) 책임자로서 연락부와 부인부(婦人部)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때 논의된 운동 방법으로는 ‘가두를 배회하지 말 것, 주의적 교양에 노력할 것, 합법 단체에 들어가 농민 대중을 의식화할 것, 독서회를 조직하여 동지 획득에 노력할 것’ 등이 있었다. 같은 해 7월에는 김두경(金斗璟)을 만나 과거 제주도 ‘야체이카(공산당 세포조직) 사건’ 때 강창보(姜昌輔) 등이 채택한 조직 및 운동 방법의 오류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앞으로 함께 활동하기로 협의하였다. 1932년 10월 중순경 자택에서 양병시·장한호와 만나서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 결성의 준비로 제주의 각 리(里)에 반(班)을, 각 면(面)에 지부(支部)를 설치하여 상향식 의사 결정 조직을 계획하였다. 또 외곽 단체로서 각 리에서 농민 대중을 규합하여 농민위원회(農民委員會)를 조직해 각각의 반(班)이 이를 지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준비단계로 새로이 운동자연구회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책임부서와 담당을 정하였다. 이 자리에서 매월 1일과 15일에 정기모임을 갖기로 하는 등 운동 방법도 논의하였다. 1933년 1월 28일 부병훈(夫秉勳) 집에서 부병훈·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결성을 위한 준비로서 부병훈을 전(全) 책임자로 한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 활동 지역을 분담할 때, 부병훈은 제주읍 일대, 김일준은 구좌면(舊左面)과 신좌면(新左面), 그는 구우면과 신우면(新右面)을 책임 지역으로 정하고 그 지역 내에서 각자 동지 규합과 실천 운동에 종사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6월 회합에서는 ‘성질이 온순한 자, 음주하지 않는 자, 비밀을 엄수하는 자’를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34년 1월에는 홍경옥(洪卿玉)에게 제주도 적색농민조합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함께 활동하기로 하고, 이후 지주의 착취 행위, 농민의 부담 과중, 기타 서민 금융기관이라 할 수 있는 금융조합의 관료적이고 고리대금적인 태도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고시진(高時珍)에게 종래의 독서회에서 청소년 다수를 규합하여 확실한 자를 동지로 획득해야 한다고 설파하였으며, 6월에는 한림축항(翰林築港) 인부 이동혁(李東赫)에게 노동자의 조직적 결속과 임금 투쟁을 위한 동맹 파업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활동한 결과, 1934년 7월 구우면 명월리(明月里) 수박 밭에서 양병시·장창구(張昌求)·고경흡(高景洽) 등과 함께 한림리 적색노동조합 및 농민조합 결성을 위한 준비로 노농연구회(勞農硏究會)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전 책임자를 맡았다. 또 산하에 가두부(街頭部)·농민부·노동부를 설치하자, 가두부를 맡아 조직 확대 활동을 하였다. 가두부는 주로 청소년들 가운데 정예 인원을 동지로 규합하여 운동의 전위부대를 조직하는 데 중점을 두고 활동하는 부서였다. 8월 회합에서는 운동이 발각되지 않도록 “회원의 모임을 폐지하고 각 부문별로 전 책임자에게 운동의 경과 보고를 할 것, 각 부문 간 상호 연락을 피할 것, 각 부문의 보고에 대해서는 전 책임자가 비판적인 지시를 내릴 것” 등을 합의 결정하였다. 9월에는 장창구에게 와포리(瓦浦里)의 부인회(婦人會)에서 여자 야학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활동하다가 동지 62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여섯 차례의 공판 끝에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미결일수 700일 본형에 포함) 형을 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같은 해 11월 11일 만기 출옥하였다. 출감 후 고문 후유증 등으로 1941년 11월 18일 사망하였다고 전해지나,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957년 4월 4일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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