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암회
金岩回1881. 3. 29 ~ 1936. 4.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박인화 의진(박처사 의진
- · 박처사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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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81년 3월 29일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갈전동(葛田洞) 납실에서 태어났다. 고향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8년 임동면 대곡리(大谷里) 출신 박인화(朴仁和), 이른바 박처사(朴處士)가 이끄는 ‘박처사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박인화는 ‘은일지사(隱逸志士)’인 처사(處士)로 지내던 까닭에 박처사로 불렸다. 박인화는 1905년에도 일제의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반발하여 의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이어 군대해산으로 의병 조직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박인화는 영남의 대표 의병부대인 유시연(柳時淵)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왕성한 의병 활동을 펼쳐나갔다. 1907년 박처사 의병부대는 유시연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수비대가 주둔하던 예안분파소(禮安分派所)를 공격하고 점령한 데 이어 9월 10일에는 영양과 안동의 접경지에서 순사 고모리(小森) 일행을 공격하여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군 수비대는 위협을 느끼고 1908년 1월부터 유시연·신돌석(申乭石)·김성운(金成雲) 의병부대에 대한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때 박처사 의병부대도 함께 교전하며 포위망을 뚫는 데 안간힘을 다하였으나 점차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 결과 5월 3일에는 대장 박처사가 밀정에 의해 체포된 후 사망하면서 의병부대의 활동은 구심점을 잃고 약화되었다. 대장 박처사가 순국하자 8월 23일부터 11월 16일까지 권계홍(權桂洪) 등과 함께 의병 투쟁을 지속하였다. 권계홍은 8월경((음)7월 14일)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영양(英陽)의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였고, 그는 의병 30여 명과 함께 8월부터 경북 안동·영양·예안 일대와 강원도 평해까지 빠르게 이동하면서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는 등 무장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08년 11월 16일 동료 의병들과 함께 일본 군경에게 붙잡혀 대구경찰서와 대구지검으로 넘겨져 조사를 받았다. 1909년 7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형법 135조에 의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이 재판에서 강원도 평해에서 1908년 6월 일어난 강도사건 용의자로 지목받은 것은 무죄로 인정되었고 수범(首犯)이 아닌 종범(從犯)으로 인정되어 징역이 감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복심법원 판결에서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1936년 4월 18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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