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엽
金度燁1899. 7. 29 ~ 1937. 10.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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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2) 1899년 7월 29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기장면(機張面) 대라리(大羅里,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아버지는 김두복(金枓馥)이고, 어머니는 송영숙(宋永淑)이다. 독립운동가 김두봉(金枓奉)이 오촌 당숙이며, 김두전(金枓全, 일명 김약수)과도 같은 일가이다. 친동생 김규엽(金圭燁)은 기장 지역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을 이끈 활동가이자 기장읍 3·1운동 때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찍이 비밀결사 단체인 기장광복회(機張光復會)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19년 4월 5일 기장읍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래시장 시위에서 기장면의 김수문(金守文)이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서재선(徐再先)에게 전달하였다. 서재선으로부터 남문 앞 축구장에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후 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김수룡(金壽龍)·최기복(崔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기장에서의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거사 일은 4월 5일 기장읍 시장 장날로 정하였다. 기장면사무소 재무서기 최창용(崔昌鎔)의 협조로 등사기와 등사판용 원지를 손에 넣고 독립선언서 400여 매를 등사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또한 혈서로 ‘양심발원 인도적 자유민족’이라고 쓴 큰 깃발과 대형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4월 5일 기장시장 장날 아침 일찍부터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깃발을 휴대하고 시장으로 가서 군중에게 나눠주었다. 오전 11시경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일제 경찰은 공포탄을 쏘면서 이들을 위협하였으나 시위는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지원부대가 달려와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김약수(金若水)의 영향으로 1924년 결성된 사회주의 사상단체 북풍회에 가입하였고, 1925년에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 파견 학생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28년 9월 조선공산당 관계자로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평양경찰서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다가 1930년 6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고 1931년 10월 말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 기장으로 돌아왔으나 혁명적노동조합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1932년 다시 부산경찰서에 붙잡혔다. 1933년 1월에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단체인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혁명적노동조합 운동을 전개하던 중 다시 붙잡혔다. 1934년 8월 24일 폐병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출옥하였고 건강이 악화되어 12월 28일 공판 정지가 결정되었다. 여러 차례의 구금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7년 10월 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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