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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순

金德順

1909 ~ 194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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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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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선천(宣川)일본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선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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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16)

관련 사건

  • · 죽마계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6) 1909년경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원동(院洞)에서 태어났다. 창씨명은 금곡덕순(金谷德順)이다. 선천공립보통학교(宣川公立普通學校)를 거쳐 1926년 평북 영변공립농업학교(寧邊公立農業學校)에 입학하여 1927년 7월 중도 퇴학하였다. 그 후 선천군(宣川郡) 사립일신학교(私立日新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30년 3월 사직하고 천도교 선천군 종리원의 지도집(知道執)에 취임하였다. 선천군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의 이사로 있으면서 농민잡지 『농군(農軍)』의 주간(主幹)을 맡아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지로상업학교(目白商業學校)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專門部) 법과(法科)에 입학하여 1940년 3월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1940년 11월부터 서울 낙원정(樂園町) 소재 공생약업주식회사(共生藥業株式會社)에 근무하였다. 귀국 직전인 1940년 3월 니혼대학의 안병익(安秉翊),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의 김사복(金思宓), 주오대학(中央大學)의 이창덕(李昌德)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 죽마계(竹馬契)에 가입하여 계장(契長)으로 추천되었다. 죽마계는 합법을 가장하여 표면적으로는 회원 간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는 우리나라 전래의 계(契) 형태를 취하면서, 이면으로는 한국 독립을 궁극적 목표로 민중 교육과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도모하는 비밀결사체였다. 죽마계 계원들은 장차 활동 무대가 국내가 된다는 전제하에 본부를 서울에 두고 도쿄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매년 7월 18일에 서울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필요에 따라 수시로 임시총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또한 매학기 1회씩 야유회를 통해 계원 간의 단결과 친목을 도모하고, 1년에 한 번 명사초청 좌담회를 개최하여 많은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는 등 규약을 제정하였다. 귀국 후인 1940년 7월 15일경 서울 정릉리 소재 약사사(藥師寺)에서 안병익·김사복·이창덕 등 계원들과 회합하여 창씨개명 반대를 결의하였다. 같은 달 18일경 서울 청량리 청량사(淸凉寺)에서 이들과 함께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계장 김사복, 간사 이창덕·안병익·이해룡(李海龍) 등을 선임하고, 본부를 도쿄에 두고 지부를 서울에 두는 것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1941년 4월 19일경 청량사에서 제1회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다시 조직을 개편하였다. 독립운동의 지도 이론 확립을 위해 김사복을 책임자로 하는 연구본부를 도쿄에 두고, 독립활동 자금 확보를 위해 안병익을 책임자로 하는 사업부를 서울에 두기로 하였다. 이때 안종식·정학룡 등과 함께 사업부 부원을 맡아 ‘텍스코’ 공장을 경영키로 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은 김사복·안종식이 맡기로 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1941년 8월 9일 일본에서 붙잡혔다. 1943년 3월 도쿄형사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옥고를 겪다가 광복이 되기 전 옥중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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