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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金東植

1898. 8. 8 ~ 1949.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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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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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奉化)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봉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신건동맹단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5)

관련 사건

  • · 1926년 제2차유림단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5) 1898년 8월 8일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법전면(法田面) 소천리(召川里)에서 김대락(金大洛)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아명(兒名)은 재석(再石)이다. 김화식(金華植)의 형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11대손으로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 운동에 뜻을 두고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영주(榮州)·안동(安東)·대구(大邱) 등지의 동지들과 구국 운동을 모색하였다. 1926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第二次儒林團義擧)를 주도하였던 아우 김화식을 후원하였다. 김화식은 서울에서 사립 중학교를 중퇴하고 1924년 4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김창숙의 후원으로 중국어를 배우던 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창숙은 1919년 제1차 유림단의거(第一次儒林團義擧)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봄 베이징에서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내몽골 지역의 3만 정보(약 297.522km²)를 개간하여 군사기지 건설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군사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20만 원을 국내에서 영남 지역 유림을 대상으로 모집하기로 하였다. 1925년 4월 김창숙은 당시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영주의 송영호(宋永祜), 달성의 이봉로(李鳳魯), 봉화의 김화식 등과 구체적인 군자금 확보 계획을 세웠다. 1925년 6월 말 송영호, 7월 하순 김화식, 그리고 8월 중순 김창숙이 차례로 서울로 들어와 거점을 확보하였다. 김창숙은 당시 서울 관훈동에 마련된 면우집간소(俛宇集刊所)를 중심으로 정수기(鄭守基)·손후익(孫厚翼) 등의 영남유림을 만나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우선 친일 부호들에게 강제로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고, 이를 수행할 무장조직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을 조직하였다. 김화식은 송영호·정수기 등과 함께 권총을 소지하고 영남 각처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6년 1월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대구에서 울산(蔚山)으로 이동하던 김창숙이 언양(彦陽)에서 자동차 사고로 허리에 중상을 입었다. 이 일로 김창숙은 3월 22일 삼랑진(三浪津)을 출발하여 중국 펑톈(奉天)으로 돌아갔다. 김창숙이 떠난 뒤, 4월 2일 동생 김화식이 붙잡혔고, 4월 3일 동생이 서울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있다는 소식을 송영호로부터 들었다. 이 소식을 듣자, 동생이 맡겨두었던 권총 2자루를 넘겨받아 은닉하였다. 5월 중순까지 관련자 대부분이 일제 경찰에게 붙잡힐 때 같이 붙잡혔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였다. 이후 「총포화약류취체령 시행규칙」 위반으로 기소되어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을 거쳐 그해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벌금 30원의 형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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