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명규

金明奎

1891. 11. 3 ~ 1950. 12. 14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명규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황해 신천(信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신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891년 11월 3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북부면(北部面) 석당리(石塘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유규(金裕奎)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신천군 산천면(山川面) 동산리(東山里)에서 서당 교사를 하였다.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의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들은 3월 초부터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다. 양측의 지도자들은 비밀리에 만남을 지속하며, 3월 11일 문화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천도교인인 곡물상 문창규(文昌奎) 등은 태극기 200개를 준비하였고, 기독교 조사(助事)인 최현식(崔賢植) 등은 인근 지역에 연락을 취하였다. 3월 11일 11시경 동각리(東閣里)에 위치한 문화시장(文化市場)에서는 기독교인 300여 명을 위시하여 천도교인과 장꾼 등 1,000여 명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시위에 방형묵(方亨默)·강영탁(康榮鐸)·강성모(康成模)·최재준(崔載俊)·최효식(崔孝植) 등과 함께 앞장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한 ‘조선’이 독립되어야 하는 이유 13조를 정리하여 인쇄하였다. 출동한 일본 헌병의 무력 저지로 시위대는 해산당하고 지도부 일부를 붙잡아 갔다. 이에 12일 아침 다시 모인 500여 명의 시위대는 문화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헌병들의 탄압을 규탄하고 구속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7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했지만, 1919년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독립 만세를 외친 것과 한국 독립 이유 13개 조의 인쇄가 정의·인도의 주창이란 취지의 상고가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