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희
金斗熙1921. 1. 4 ~ 2000.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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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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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21년 1월 4일에 태어났으며,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수륜면(修倫面) 수륜리(修倫里) 출신이다. 이명은 김길남(金吉男), 창씨명은 김옥길남(金玉吉男), 김성길남(金城吉男)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시(京都市) 리츠메이칸중학(立命館中學) 야간부(夜間部)에 다니면서 소네타일주식회사(曾根)タイル株式會社에서 직공으로 일하였다. 1939년 5월 7일 아이치현(愛知縣) 나고야시(名古屋市)에서 이수영(李秀濚), 김옥두(金玉斗)·양달성(梁達成)·신임휴(申任休)·이제동(李諸同)·신원식(申元植) 등과 함께 비밀결사 민족부흥회(民族復興會)를 조직하였다. 민족부흥회는 표면상으로는 한국인의 생활 개선, 보도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는 친목단체를 표방하여 평화회(平和會)라는 명칭을 내걸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강령·규약 등을 정하고 민족차별 문제 등을 들어 재일 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완전한 독립국가인 공화국 조선의 건설’을 지향한 조직이었다. 민족부흥회 회원들은 결성 이후 세계 각 민족의 흥망 경위와 민족 독립에 관한 이론, 3·1운동 등 과거 민족운동에 대한 검토를 통해 당면의 운동 방침을 결정하였다. 전 민족적 총 폭동을 전개하여 한꺼번에 일본이 가진 통치권과 모든 설비를 한국인의 손에 탈환하여 독립을 완수하겠다는 계획 아래, 자신들의 임무는 그러한 혁명운동의 지도체 결성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들은 독립을 위한 전략으로 레닌주의에 의한 민족해방투쟁은 잘못이라고 보고, 한국 민족의 해방과 번영은 민족자결에 의한 민족단일국가 건설 이외에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하였다. 국내에까지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이수영을 파견하려다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40년 3월경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나 같은 해 7월 16일 풀려났다. 그런데 그 사이 6월 23일에 핵심 인물인 이수영 등 동지 22명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조직이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 11명은 같은 해 11월 21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나고야지방재판소(名古屋地方裁判所)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12월 28일 다시 붙잡혀서 기소되었다. 1941년 5월 5일 나고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후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5월 이른바 사상범보호관찰법 제1조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시행규칙 제14조에 의거하여, 대구보호관찰소에서 보호사(保護司) 삼포수일(三浦秀一)의 관찰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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