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평
金栢枰1900. 8. 20 ~ 1990. 12.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맞돕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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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0년 8월 20일 전남 여수군(麗水郡) 여수면(麗水面) 서정(西町, 현 여수시 중앙동 일대) 상정(上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여수 지역의 이름난 만석꾼이자 1907년 여수 군수서리, 1932~1935년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 등을 지낸 김한승(金漢昇)이다. 김한승의 4남으로 3·1운동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4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으며, 서울 송현동(松峴洞) 신옥우(申玉雨) 집에서 하숙하였다. 중앙감리교회에 다니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김창준(金昌俊) 목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19년 2월 28일 밤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강기덕(康基德)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매 정도를 전달받고, 다음 날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 선언이 있을 예정이니 그때 선언서를 배포하도록 요청받았다. 3월 1일 오전 중에 학과를 마치고 하교하는 학생들에게 오후 2시까지 파고다공원으로 모이도록 권유하였다. 이후 인사동과 낙원동 일대의 각 민가와 행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파고다공원에 도착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행진은 종로를 거쳐 남대문, 의주통(義州通, 현 의주로), 미국 영사관 앞에 이르렀다. 이후 대한문 앞과 종로를 거쳐 광화문과 서소문 일대를 거쳐 본정(本町, 현 충무로)에서 해산하였다. 3월 5일까지 만세 운동을 지속하다가 귀가하던 중에 명치정(明治町, 현 명동) 부근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을 명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1일 심문조사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된 이유와 장래에도 지속할 것인지를 묻자, “한국은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과 병합된 것은 유감이며, 독립할 좋은 시기가 당도하면 그때도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개월 형이 선고되었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에서 기각당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20년 4월 28일에 석방되었다. 출옥 이후 고향인 여수로 내려가 민중계몽과 대중사업에 힘썼다. 1921년 5월경 서로 믿고 돕자는 의미로 맞돕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맞돕회에서는 야학을 개설하여 한글을 가르치며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지역민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조직 초창기에는 자신의 집에서 야학을 열었다가 군자동(君子洞) 근처 개인 집을 거쳐 종고산(鐘鼓山) 아래 교회로 옮겼다. 맞돕회는 재정자립도를 높이려고 이발소와 쌀가게도 운영하였다. 그러나 독일로 유학을 떠남에 따라 맞돕회는 여수지방 청년회로 흡수되었다. 독일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인류학과 생물학을 수학하였다. 이후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산부인과 전문의로 의학박사가 되어 베를린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당국에 의해 폴란드 바르샤바의 크라쿠프병원장을 지냈다. 이후 괴팅겐대학 병원장으로 있다가 소련군의 점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이하였다. 195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워싱턴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로 재직하다가 동 병원의 간호사와 결혼하였다. 1977년 60여 명을 수용하는 양로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990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이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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