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련
金秉璉1897. 1. 20 ~ 1949. 7.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민족대동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는 덕필(德弼), 호는 일소(一笑)·일주(一舟)이다. 1897년 1월 20일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물야면(物野面) 오록리(梧麓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김규창(金奎昌)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조양학교(朝陽學校, 현 봉화초등학교의 전신)에서 신교육을 받은 후 서울로 올라가 문천동(文川洞)·소격동(昭格洞)에 거주하며 보성고보(普成高普)를 다녔다. 1919년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코자 상하이(上海)로 가려고 동년 (음)3월부터 9월경까지 수차에 걸쳐 모집한 자금 4천원 중 1,000여 원을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조선총지부장인 신덕영(申德永)에게 건네주었다. 아울러 그와 함께 독립운동 선전물을 배포하였다. 동년 (음)9월 신덕영이 신종선(申鍾善)을 통해 보낸바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 명의의 군자금 영수증 용지 2장을 받아서 김두백(金枓白)에게 교부하여 군자금 모집에 활용토록 하였다. 경북 선산(善山) 출신의 최재화(崔載華)가 1919년 6월경부터 국내에서 은밀히 벌인 만주 무관학교 입학생 또는 독립단 신입자 모집운동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1920년 9월 경북경찰부에 붙잡혀 조사받았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위의 군자금 모금 활동 내역이 일경에 포착되어, 1921년 2월 초에 신종선·김두백과 함께 붙잡혀 갔다. 1921년 7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죄목으로 징역 1년 형이 선고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22년 7월 27일 만기 출옥하였다. 1923년 5월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 봉화지방부의 집행위원 중 1인이 되어 활동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0월부터 만 3년간 물야면장을 지내다 1949년 향리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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