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무
金炳武1901. 4 . 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5) 1901년 4월 3일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전창면(田昌面) 유전동(楡田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보국(金保國)·김보국(金輔國)·김병무(金秉武)이다. 일곱 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였다. 1921년 (음)2월 펑톈성(奉天省) 환런현(桓仁縣) 이차구(裡岔溝)에서 손서하(孫西河)의 권유로 한교공회(韓僑公會)에 가입하여 항일 활동을 하였다. 한교공회는 환런현에 본부를 두고 각처의 한인 청년을 조직하여 독립 자금의 모집, 일제의 침략기관 습격 및 파괴, 친일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한교공회가 1922년 8월 남만주의 통합 독립군단으로 결성된 대한통의부(통의부)에 참여하면서 통의부 의용군으로 활동하였다. 통의부는 1920년 10월 일제의 소위 간도토벌 이후 좀 더 효과적인 항일전을 벌이고자 1922년 8월 23일 환런현 마권자(馬圈子)에서 열린 남만한족통일회의에 참여한 서로군정서·대한광복군영·대한정의군영 등의 독립군 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통의부는 김동삼(金東三)을 총장으로 하는 중앙조직과 한인 마을을 자치 대상으로 하는 지방조직, 그리고 항일 무장투쟁을 벌일 군사조직으로 의용군을 설치하였다. 통의부에 참여한 각 단체의 독립군을 통합한 의용군은 김창환(金昌煥)을 사령관으로 하여, 1개 대대 산하에 5개 중대와 독립중대인 유격대 및 헌병대의 7개 중대로 편제하고, 1개 중대는 3개 소대로 편성하였다. 의용군이 국내 진공 작전, 군자금 모집, 친일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할 때 1923년 통의부 의용군 제4중대 제2소대장이 되어 활발한 항일 투쟁을 벌였다. 그런데 통의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파와 복벽파의 갈등으로 1923년 2월 복벽파 계통의 인사들이 새로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설립하고 이후 통의부와 대립하였다. 의용군 제1·2·3중대와 일부 유격대·독립소대는 분열된 독립군 세력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하나로 통합하자고 주장하며 통의부와 대립하자 통의부를 지지하는 의용군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6월 16일 통의부를 지지하는 의용군 장교들과 함께 임시회의를 열고 ‘대한통의부의 신성(神聖)을 보장하고 통일적 운동으로 광복 사업을 완성하자’라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해 8월에는 부하 30여 명을 지휘하여 유격대장 문학빈(文學彬)과 함께 통의부에 반대하는 의용군 간부 백광운(白狂雲) 등을 체포하려 나서기도 하였다. 1924년 6월 통의부를 반대하는 의용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를 따로 조직하자 통의부 등 8개 단체는 그해 11월 24일 화뎬현(樺甸縣)에서 전만통일회를 열고 새로운 통합 독립군단인 정의부를 결성하였다. 정의부는 1925년 3월 본부를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옮기고 이탁(李沰)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집행위원회와 민사·군사·법무·학무 등 8개 행정부서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군사부 아래에 이청천(李靑天)을 사령장으로 하는 6개 중대 12소대의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28년 4월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문빈(文彬), 지린성(吉林省) 하이룽(海龍)·류허현 지방총관 김우권(金宇權)과 함께 하이룽현 지방 시찰에 나섰다. 같은 달 21일 시찰 일행은 그곳 북산성자(北山城子) 백응천(白應天) 집에 머물렀다. 이때 하이룽현 일본영사관 경찰이 이를 알아채고 중국군 40여 명을 지휘하여 백응천의 집을 포위하고 모두 붙잡았다. 4월 26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28년 10월 2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1년 10월 29일 만기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