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
金炳秀1879. 3. 13 ~ 1944. 8. 2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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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9년 3월 13일 경상북도 문경군(聞慶郡) 신북면(身北面) 평천리(平川里)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수형인명부에는 신북면 용리를 본적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북면 오고리를 출생지로 기재해 놓았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덕진(德眞)이며 호는 해선(海仙)이다. 1919년 4월 15일 신북면 갈평시장(葛坪市場)의 장날에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3·1운동 이전 영남 지역의 독립운동은 주자학적 민족주의의 계보를 이어 양반 신분의 의병장부터 일반 농민에 이르기까지 전 계급과 신분에 걸쳐 침략자 일제에 대한 저항 감정이 확산되어 앙양되었다. 따라서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 통치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투쟁이 전국 어느 곳보다도 끈기 있게 지속되고 있었다. 영남은 일본 본토와의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해 일제의 한반도 침략에 있어서 전초기지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따른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더해져 전국 어느 곳보다도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조건과 계기가 성숙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이 폭발은 곧 거족적인 만세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듯 일제 지배의 모순이 격렬하게 분출하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전개되어 강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피탈되는 것에 평소 불만이 많았다. 1908년 의병대장 이강년(李康年) 휘하의 선봉장 권용일(權用佾)에게 가산(家産)을 처분한 현금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후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이를 벗어나고자 문경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독립을 염원하던 중 서울에서 거행된 3·1운동의 소식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지역사회에서도 자체적인 독립 만세 운동이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고장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8시경 동료인 신태인(申泰仁)과 함께 도로 보수를 위해 나온 부역 인부 40여 명을 규합하여, 신북면 갈평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 3명이 총검으로 위협하며 해산을 강제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끝까지 일제에 저항하며 그 의기를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5월 12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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