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칠
金炳七188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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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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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5)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신영면(新寧面) 송산리(松山里) 출신이며 1921년 당시 33세인 점으로 미루어 1888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김원삼(金元三)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봄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서 그해 7월 대한독립야단(야단)에 가입하였다. 야단은 3·1운동을 계기로 만주 각지에서 항일 단체와 독립군단이 조직될 때, 5월경 동학의 한 교파인 청림교도(靑林敎徒)가 주축이 되어 북만주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조직한 독립군단이다. 본부를 옌지현(延吉縣) 동불사(銅佛寺)에 둔 야단의 단장은 청림교주인 신포(申砲)이고 주요 간부는 임창세(林昌世)·김광숙(金光淑) 등이었다. 1920년 10월 상순 야단 모험국장 유성근(柳聖根)의 지휘 아래 다른 모험국원(冒險局員)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다. 우선 함경북도 무산·길주 성진 3개 군에서 단원과 군자금 모집을 하기로 하고 3개 군에서 단원 31명과 군자금 다수를 모집하였다. 이후 나머지 국원들을 만주로 돌려보내고 유성근과 함께 각지를 다니며 군자금 모집을 하였다. 성천을 지나 단천으로 가던 중 무기를 휴대한 것이 일본 관헌에게 발각될 우려가 있어 마혈령(馬穴嶺)에 있는 한 사당(祠堂)에 휴대한 무기를 숨겨두었다. 단천에서 함흥, 원산을 거쳐 11월 16일 서울에 도착한 뒤 유성근과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온 뒤 1921년 2월 이부(異父) 동생인 박정규(朴貞奎)와 함께 단천으로 가서 숨겨두었던 무기를 찾아와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그해 2월 8일 용강군 대대면(大代面) 해산리(海山里), 13일에는 같은 군 다미면(多美面) 동전리(東箭里), 19일에는 삼화면(三和面) 충흥리(忠興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어 황해도로 내려와서 2월 27일 안악군 안곡면(安谷面) 입석리(立石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4월 16일 은율군 일도면(一道面) 누리(樓里) 김창대(金昌大)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중 장연경찰서 순사를 만나 총격전을 벌인 뒤 도주하였고, 함께 행동하였던 박정규는 부상을 당해 붙잡혔다. 평양으로 도주하여 이름을 김원삼(金元三)으로 바꾸고 남정(南町)에 있는 태평여관에 피신해 있던 중 5월 19일 용강경찰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21년 9월 2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몇 차례 감형을 받아 1929년 6월 17일에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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