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준
金鳳俊1904. 12. 8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혁명대본영
포상 정보
- · 애족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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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5) 1904년 12월 8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공서면(公西面) 고당리(古堂里)에서 태어났다. 이명(異名)은 이일심(李一心)이다. 조선혁명대본영은 1919년 7월경 만주에서 결성된 창의단(倡義團) 조직의 하나로서, 창의단은 의병 출신과 국민의회파가 중심이 되어 북간도(北間島)와 함경북도 무산(茂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주로 관공서 폭파와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전좌한(全佐漢)과 김응선은 창의단원인 계의산(桂義山)으로부터 “조선독립은 폭격, 암살을 제일로 삼는다”라는 말을 듣고 거사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미 1925년 (음)9월부터 국내에서 폭탄 제조 등을 준비하였다. 1926년 (음)7월 중순경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장가소과(張家燒鍋)에 있는 한하강(韓荷江)의 집에서 조선혁명대본영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전좌한을 비롯하여 남정(南正)·이백파(李白坡, 일명 李應瑞) 등이 그해 (음)4월 초순경 지린성 중동철도선(中東鐵道線)의 연선(沿線) 얼다오허쯔(二道河子)에서 결성한 비밀결사이다. 이후 단원 40~50명을 모집하여 지린성 왕수현(王洙縣) 오길밀하(烏吉密河)에서 한국 독립을 선전하는 경고문과 군자금 영수증을 인쇄하여 단원에게 배포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던 중이었다. 조직에 가입한 후 전좌한·남정·이백파 등과 함께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신청사 낙성식에 즈음하여 국내로 들어가 단원들과 함께 신청사를 비롯한 각 관청에 폭탄을 투척하고 독립사상을 선전·고취하기로 결의하였다. 전좌한과 함께 이 준비를 위해 선발대로 선정되어 「경고문(警告文)」·「수령서(受領書)」, 권총 2정과 탄환 39발을 휴대하고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으로 갔다. 안둥현 대화교통4정목(大和橋通四丁目)에 거주하는 이정해(李靜海)에게 의뢰하여 그의 누이동생이 신의주(新義州) 학교에 통학할 때 위 문서와 물건들을 숨겨서 반입하도록 하였다. 전좌한은 이 물건들을 신의주우편국에서 ‘경성부 누하동(樓下洞) 272번지 임영덕(任泳德) 집 김봉수(金鳳洙) 앞’으로 발송하였다. 이와 같이 선발대로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년여 동안 예심에 붙여 있다가 1927년 6월 17일 종결되어 검찰로 송치되었다. 같은 해 8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총포화약류단속령, 우편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미결구류 90일 산입) 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주도했던 계의산·김응선·전좌한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중국 펑톈(奉天) 등지로 도주하면서 계속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다가 전좌한·김응선은 붙잡혔으나 계의산은 끝까지 잡히지 않았다. 이 사건 계획이 바로 직전에 발각된 배후에는 전좌한과 계의산이 경기도경찰부 고등과 가와사키(河崎) 및 다나베(田邊) 경부보(警部補)의 밀정으로 있어서 전좌한이 사전에 이를 밀고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당시 『매일신보』에서도 이 사건을 “경기도경찰부 고등과 밀정 김좌한(전좌한의 오기-필자)이가 꾸며놓은 연극 같은 사건”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재판 당일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전좌한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재판정에서 “발로 마루장을 구르며 일시 흥분적 거동을 취하였으나 간수의 제재로 그만두고 말았다”라고 한다.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이른바 ‘1928년 은사(恩赦)’로 징역 1년 5월 19일로 감형되어 형 집행 만기일을 며칠 앞둔 1928년 11월 29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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