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민
金思民1898. 11. 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신생활사 필화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98년 11월 5일 충청남도 연산(連山, 현 논산시) 출신으로 아버지 김경수(金慶秀)와 어머니 순흥(順興) 안씨 안국당(安國堂)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울청년회의 지도자 김사국(金思國)의 친동생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형 김사국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형 김사국을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반일 무장투쟁에 종사하였다. 1917년 무렵 서울에 올라와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들어가서 근무하였다. 1920년 5월 김광제(金光濟) 등이 창립한 조선노동대회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7월에는 개성(開城) 장대전(將臺前) 예배당에서 열린 노동대회강연회에서 노동대회 회장 김광제와 함께 참가하여 ‘힘있거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20년 8월 20일에는 미국의원단 방문에 맞춰 독립청원운동을 계획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보안법 제5조 위반으로 구금되어 1920년 9월 1일 인천 덕적도(德積島)로 1년간 거주제한 조치를 당했다. 1921년 10월 일본 도쿄에 건너가서 미나미센주(南千住) 교외에서 김사국이 주도하는 사회혁명당에 박상훈(朴尙薰)·임봉순(任鳳淳) 등과 참가하였다. 1922년 8월 국제공산청년회의 지도하에 고려공산청년회 3차 중앙총국이 서울에서 구성되자, 조선공산당(중립당) 대표로 김사국·안병진·전우(정재달)·조훈(趙勳) 등과 참가하였다. 1개월 만에 당과 공청 간의 상호관계 문제를 둘러싸고 조훈과 견해 차이로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탈퇴하였다. 10월에는 김사국을 비롯하여 이영(李英)·김영만(金榮萬)·임봉순(任鳳淳) 등 15명과 서울청년회 내부 ‘공산주의그룹’을 창립하고 경기도 오르그에 임명되었다. 1922년 10월에는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자유노동조합自由勞動者組合 발기총회 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자유노동자조합 취지서’를 이시우(李時雨) 등과 인쇄하고, 그 내용을 1922년 11월 11일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잡지 『신생활(新生活)』 11호에 게재하였다. 이로 인해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발생하여 『신생활』 11호는 일제 당국에 압수되고 출판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23년 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하던 중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여 간수의 칼을 빼앗아 저항했으나 이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받아 정신이상이 되었다. 1924년 7월 출옥 후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釋王寺)에서 어머니의 간호를 받았다. 1925년 3월 조선노동대회를 경성노동회로 개편하는 데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후 행적에 대해 구체적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1933년 5월 4일자 『조선일보』에서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사민은 모친과 견지동 청년총동맹 사무실 한쪽 구석에 다다미 석 장을 깐 방에서 살고 있었다. 일제의 고문과 굶주린 창자에 구걸로 정신이상이 생긴 김사민은 그 와중에서도 그날그날의 각종 신문 수십관을 방 한모퉁이에 정연히 쌓아두고 있었다.” 김사국의 딸 김사건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김사건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까지 생존해 있었으나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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