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
金炳賢미상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통의부
- · 참의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출신이며, 만주에서는 펑톈성(奉天省) 싱징현(興京縣) 서두문자(西頭門子)에 거주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으며,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퉁화현(通化縣)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약칭 통의부)에서 군대를 모집할 때 주변의 권유로 입대하였다. 1923년 9월 통의부 내의 젊은 대원들이 복벽주의(復辟主義)에 반대하며, 공화주의(共和主義)에 입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의 항일무장부대인 참의부(參議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1924년 5월 27일 참의부가 만철연선(滿鐵沿線)의 친일 세력을 처단할 목적으로 대원들을 파견할 때 참가하였다. 당시 참의부에서는 2대의 파견대를 조직하였는데 제1대는 최성(崔聲)의 지휘 하에 싱징현에서 카이위안(開原)방면으로, 제2대는 김광추의 지휘 하에 박상만(朴相萬)과 함께 푸순(撫順) 방면으로 파견되었다. 6월 1일 푸순에 도착한 대원들과 함께 푸순현 치안웨이(前甸子)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윤영기(尹永基)를 만났다. 윤영기의 안내로 그날 저녁 푸순 민회(民會)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기(書記)로 있던 친일파 정갑주(鄭甲柱) 부자(父子)를 처단하고 사무실 문간에 사형선고문을 붙이고 현장을 빠져나옴으로써 거사에 성공하였다. 6월 4일에는 펑톈에 도착하여 동흥여관(東興旅館)에서 조선일보 만주지국장 신명구(申明球)를 만나 만주 지역 친일파의 거두인 보민회장(保民會長) 최정규(崔晶奎)의 처단에 관해 논의하였다. 최정규는 보민회를 조직한 후 만주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량한 동포들을 독립단이라고 하여 죽이거나 못살게 굴어 원성을 사던 인물이었다. 참의부에서는 최정규가 여러 차례 보낸 설유(說諭)와 경고를 거부하자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7일 저녁 최정규의 집으로 찾아가 박상만과 함께 집 밖에서 문을 지켰고 김광추가 집안으로 들어가 최정규의 부인과 장모를 사살하였다. 2층에 숨어있던 최정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해 응징하지 못하였다. 현장을 빠져나온 일행은 펑톈성 내의 금정관(金井館)이라는 한국음식점에서 군자금 300원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출동한 중국 관헌에 의해 박상만과 함께 붙잡혔다. 김광추는 푸순 부근 한인 민가에서 은신하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밀정의 고발로 6월 15일 펑톈영사관 경관대에 의해 포위되자, 반시간 가량 총격전 끝에 머리에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은 ‘친일파토벌대사건’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일제 경찰은 검거 과정에서 대원들로부터 권총 3자루와 탄환 160발 및 폭탄 1개와 사형선고문 등을 압수하였다. 취조 과정에서 일본영사관 경찰들로부터 집단 폭행과 물고문 등을 당하였는데, 재판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제 경찰이 행한 고문의 실상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1924년 8월 19일 일본 관동청(關東廳) 감옥 분감(分監)으로 호송·투옥되었으며, 1925년 8월 21일 관동청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독립군에 입대한 이유가 독립전쟁을 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또한 농민들의 돈을 군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빼앗는 것은 아닌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대해 세납을 하지 않은 일이 있으면 군인들이 가서 받는 경우가 있다고 분명한 어조로 답변하였다. 1926년 7월 21일 동(同) 법정에서 박상만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형이 확정되자 재판장에게 우리는 죽어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