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金相圭187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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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9) 1879년경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신상면(新上面) 유구리(維鳩里, 현 충남 공주시 유구읍)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상교(金相敎)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공주군 신상면에 위치한 유구시장(維鳩市場)에서의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의 고조라는 국제 정세에 입각해 한국에서도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어 1919년 3월 1일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 등 33인과 군중이 주도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인은 각지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는 데 앞장섰다. 공주에서도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공주 지역 유지들은 1919년 3월 12일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주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사전에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감시가 강화된 공주 시내를 대신해 다른 지역에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유구시장은 유구리 뿐만 아니라 녹천리(鹿川里)·덕곡리(德谷里)·만천리(萬川里)·석남리(石南里)·신달리(新達里) 등 공주 북서부 지역 사람들이 이용하는 주요 장터로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또한 1918년 조선총독부가 식수(植樹)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강요한 무리한 부역, 식수 비용 갹출(醵出) 등으로 인해서 신상면 일대의 민심은 일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경 천도교인 황병주(黃秉周)의 주도로 30여 명의 군중이 유구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자 순식간에 참여자가 5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군중을 해산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주도자인 황병주를 유구경찰관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시위 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이승현(李升鉉)의 주도로 황병주의 석방을 요구하며 100여 명이 주재소 앞에 다시 운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재옥(河在玉)의 집 앞에서 정희준(鄭熙準)이 “너희도 한국인이 아니냐. 어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라며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취하자, 이에 호응하여 강태하(姜泰河)·조병옥(曺秉玉)·윤창선(尹昌善) 등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주재소로 달려가 황병주를 석방하라는 시위에까지 참여하였다. 주재소에서 황병주를 석방하지 않자, 이정춘(李正春)이 돌을 던져 주재소 유리창을 깨트리는 것으로 실력 행사가 시작되었다. 김병헌(金秉憲)·현우석(玄宇錫) 등과 함께 주재소 사무실에 투석하며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이후 만세 시위 과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구시장으로 출동한 공주경찰서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원에 의해 시위참여자 32명이 체포되면서 해산당하였다. 이때 순사보 박용진(朴龍珍)의 증언으로 적극 참여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황병주 등 22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6월 1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 자세한 행적과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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