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항
金善恒186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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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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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66년경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쌍룡면(雙龍面) 운포리(雲浦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54세로 3·1운동에 참여하였을 당시 고향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평안도는 평양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력이 강하고 인적 네트워크와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3·1운동 당시에도 평양 인근의 강서군·대동군(大同郡) 등에서는 교회 조직을 바탕으로 이웃 지역의 만세 운동에 대한 참여와 보조가 상당하였다. 평양에서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이 전개되자 주변 지역에서도 호응하고자 하였다.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 반석교회 목사 송현근(宋賢根)과 김병주(金炳疇) 등은 원장교회 윤상열(尹相悅)·차현구(車玄九), 반석면 교회 장로 최능현(崔能賢), 합성학교(合成學校) 교감 임이걸(林利杰) 등과 연계하여 3월 4일 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송현근·김병주 등이 사전에 체포되고 송현근만 석방됨에 따라 원장리와 반석교회 및 합성학교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계획에 따라 3월 4일 오전 10시 합성학교 운동장에 모여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沙川市場, 모락장)과 사천헌병주재소로 향하여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헌병 사토 지쓰고로(佐藤實五郞)와 한국인 보조원 강병일(姜炳一)·박요섭(朴堯燮)·김성규(金聖奎) 등이 발포하며 수 명을 체포하자 일단 흩어졌다. 송현근·최능현·임이걸 등이 원장리로 향하여 다시 3,0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고 모락장으로 만세를 부르며 나아갔다. 이에 일본 헌병과 한국인 보조원들이 도중에 매복해 있다가 다시 발포를 하였다. 시위 군중은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행진하였다. 놀란 일본 헌병과 보조원들은 주재소로 도망갔으나 시위 군중이 쫓아가 공격하였다. 모락장으로의 2차 진군과 주재소 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안상익(安相益)·이현(李鉉) 등과 함께 발포한 한국인 헌병보조원 강병일이 산으로 도망가자 추격하여 처단하였다. 이외에도 시위 군중은 가옥에 불을 지르며 거류 일본인들과 충돌하였고, 일본 헌병 사토 및 한국인 보조원 등 총 4인을 처단하였다. 이후 헌병대의 출동으로 시위가 진압되는 와중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특히 헌병보조원 처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중죄인으로 간주되었다. 1919년 8월 13일 동료 50명과 함께 평양지방법원에서 살인·방화·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12월 6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이후 자세한 행적과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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