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성규

金聲奎

1883. 2. 11 ~ 1952. 12. 12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성규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
  • · 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3년 2월 11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원황동(遠黃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영덕 지역의 3·1 만세 시위는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의 기독교 북장로회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낙평동 구세군교회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 그리고 병곡면 송천동(松川洞)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에 의해 처음 논의되었다. 그러나 김세영이 3월 13일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권태원과 정규하가 만세 시위 준비를 주도하고 세력을 규합해갔다. 3월 18일로 예정된 영해장터에서의 만세 시위를 앞두고, 권태원은 송천동에 거주하는 권씨 일족과 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정규하는 송천동 부근 기독교도들을 규합하기로 하였다. 또한 권태원과 정규하의 권유에 따라, 창수면(蒼水面) 인량동(仁良洞)의 권상호(權相鎬)는 창수면 인량동 및 오촌동(梧村洞), 영해면 원구동(元邱洞) 등지의 권씨·이씨·백씨들을, 남효직(南孝直)은 영해면 괴시동(槐市洞)의 남씨들을, 남여명(南汝明)은 축산면(丑山面) 하번동(下煩洞)의 박씨들을 규합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18일 장터에는 정규하의 기독교 신자들과 송천동의 권씨 일족, 남효직과 남여명이 인솔해 온 사람들, 장을 보러 온 사람들 등으로 약 3,000여 명이 운집하였다. 오후 1시경 정규하와 박희락(朴羲洛)이 영해경찰관주재소 앞뜰에서 중·대형 태극기를 휘두르고, 남여명이 쌀시장 인근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구장인 안상식(安商植)의 권유를 받고 시위에 참가하여 이상화(李祥和)·서삼진(徐三辰)·조영한(趙榮漢)·손영세(孫永世)·남교문(南敎文)·김치운(金致雲)·장성렬(張星烈)·김성욱(金聲旭)·김학이(金鶴伊) 등과 함께 군중 속에서 만세를 부르고 행진을 이끌었다. 시위는 평화적인 형태로 시작되었으나 일제 경찰의 강압적인 해산 명령으로 인해 격렬해졌다. 시위대는 경찰주재소, 공립보통학교, 공립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우편소 등의 시설을 차례로 파괴하였는데, 군중과 함께 경찰서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이튿날인 19일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포항의 일본군 헌병대와 대구의 보병 80연대가 파견되어 실탄 사격을 하자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이후 시위 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속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이해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이후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고, 1952년 12월 1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