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욱
金聲旭1870. 8. 15 ~ 1949.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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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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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0년 8월 15일 경산북도 경산군(慶山郡) 진량면(珍良面) 평사동(坪沙洞)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원황동(遠黃洞)에 거주하였으며,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영덕 지역 3·1운동은 군 내 총 9개 면 가운데 영덕면·남정면(南亭面)·지품면(知品面)·영해면·병곡면·창수면(蒼水面)의 6개 면에서 일어났다. 이 중 영해와 영덕군의 만세 시위는 조직적으로 준비한 지역이었다. 만세 시위 계획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洛坪洞)의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한 후 평양신학교 유학을 단념하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3월 12일 김세영은 낙평동 교회의 구세군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서울·평양·대구 등지의 만세 시위 상황을 전하면서, 영덕 지역도 동참할 것을 제안하였다. 13일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김세영이 검거되었으나, 15일 권태원은 병곡면 송천동(松川洞)의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에게 김세영의 계획을 전하였다. 권태원은 송천동에 거주하는 권씨 일족과 함께 참여키로 다짐하였고, 정규하는 송천동 부근에 거주하는 기독교도들의 규합을 약속하는 한편, 만세 시위 장소로 김세영이 제시한 영덕읍 대신 영해 장터를 제안하였다. 15일 밤 정규하는 창수면 인량동(仁良洞)의 명망가인 권상호(權相鎬)와 만나, 창수면 인량동과 오촌동(梧村洞), 영해면 원구동(元邱洞) 등지의 권씨·이씨·백씨 성의 양반들을 규합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6일에는 송천동 교회로 가서 90여 명의 신자에게 만세 시위 동참을 호소하였다. 같은 날 권태원과 정규하는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권중엽(權重燁)·권문경(權文景) 등과 만나, 남효직은 영해면 괴시동(槐市洞)의 남씨들을, 남여명(南汝明)은 축산면(丑山面) 하번동(下煩洞)의 박씨들을 규합하기로 분담하였다. 권태원·정규하·서삼진(徐三辰)·조영환(趙榮漢), 박희락(朴羲洛)과 더불어 만세 시위 준비 단계부터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7일 정규하가 주도한 조영한 집에서의 회합에도 박희락·서삼진·김치운(金致雲)·손영세(孫永世)·김원발(金源發)·권유동(權有東)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18일 오후 1시경 정규하·남여명·권영조(權永祚)·박희락 등이 큰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영해 장터의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조영한·김원발·손영세·김치운·이상화(李祥和)·장성렬(張星烈)·김학이(金鶴伊) 등과 함께 시위행진을 이끌었다. 장터 부근의 영해경찰관주재소 주임순사 스즈키 쓰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시위대는 주임순사를 비롯하여 순사 및 순사보를 구타하고 제복, 제모, 패검 등을 훼손하였다. 이어서 경찰주재소, 공립보통학교, 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우편소 등의 시설도 파괴하였다. 만세 시위는 이튿날인 19일까지도 이어졌으나, 오전 10시경 포항의 헌병대가, 오후 5시에는 대구의 보병 80연대가 도착하여 시위 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속이 단행되었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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