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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길

金壽吉

1902. 1. 26 ~ 193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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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수길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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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金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김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계성학교
  • · 대구고등보통학교
  • · 성경학교
  • · 신명여학교
  • · 혜성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2년 1월 26일 경상북도 김천군(金泉郡) 증산면(甑山面) 금곡동(金谷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사립계성학교(私立啓聖學校) 학생이었다. 김수길(金秀吉)이라는 이명이 있다.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대구(大邱)와 김천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천은 경부선 교통의 요충지여서 3·1운동의 소식을 일찍부터 접할 수 있었다. 1919년 3월 초순 김천의 황금동 장로교회 전도조수(傳道助手)인 김충한(金忠漢)은 평양과 서울 등을 여행하며 3·1운동을 목격하고 김천에서도 거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 무렵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서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西門市場) 장날을 이용하여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등의 학생들과 연합해 1,000여 명이 참여한 독립 만세 운동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만세 시위는 일제의 진압으로 해산당했고, 참여한 학교들은 휴교령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 시내에 배치된 일본군 보병 제80연대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고향인 김천으로 피신하였다. 피신 중에도 김천 에서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자 김천지방 항일운동의 중심지인 황금동교회로 찾아갔다. 여기에서 김충한을 만나 대구에서의 만세 시위운동 경과와 세계 정세를 설명하면서, 한국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인 이때 김천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을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김충한은 즉석에서 찬동하여 뜻을 함께하였고, 최용수(崔龍洙)·한명수(韓明洙)도 이에 찬성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다. 다음 날인 9일 밤, 김충한·최용수·한명수와 황금동교회에서 다시 만나 그 자리에 있던 주남태(周南泰)·김원배(金元培)·박태안(朴泰安)·차경곤 등과 자리를 함께하여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협의하였다. 김충한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한 격문을 작성하고, 최용수·박태언은 인쇄를 담당하였다. 또한 박태언이 인쇄물 배포를, 최용수는 인쇄 장소로 자신의 집을 제공하였다. 이때 옥양목으로 된 태극기를 만들었고, 주남태와 김원배는 종이로 태극기를 만들어 준비하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격문에 표기할 김천 독립운동 거사의 민족 대표로는 김충한과 황금동교회 장로인 최용수로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거사 날짜는 읍내 장날인 3월 11일 오후 3시로 협의하였고, 장소는 용두동 감천다리 부근으로 정하였다. 그들은 군중에게 한국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는 동시에 격문을 배포하고, 태극기를 선두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김천 시내를 행진하기로 협의하였다. 하지만 거사 당일인 3월 11일이 되고 거사에 앞서 격문을 등사한 등사기를 본래 있던 김천 저축계 사무실로 돌려보내던 중 이를 미행하던 일제 경찰이 등사 원고지를 발각해 압수하고 황금동교회에 있던 주동 인물 4명을 체포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체포를 면한 후 독립운동 투쟁을 계속 이어나가려고 하숙집에서 이영식(李永植)·허성도(許聖徒)·이기명(李基明)·이종식(李鍾植) 등과 만나 대구 시내의 한국 상인들에게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상점 철시와 일본인과의 거래를 중단할 것을 종용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남산정(南山町) 박준이의 방에서 ‘죽음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관철할 것’이라는 내용의 동정표시경고문(同情表示警告文)」 300여 매를 등사하여 시내 각 요소와 서문 장터에 배포함으로써 상점 80여 호의 폐점 철시 투쟁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4월 6일에는 대구경찰서장 시라이요시사부로(白井義三郞)에게 「암살협박문(暗殺脅迫文)」을 우송하여 3월 8일의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한 많은 시위 군중을 체포한 데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였다. 한국 상인들에게 폐점 투쟁할 것을 촉구하는 경고문 제2호 400여 매를 등사하여 시내 요소에 배포하였다. 또한 김천의 안동규(安東奎)에게는 「독립운동자금보조요구탄원서(獨立運動資金補助要求歎願書)」를 발송, 민족 자산가를 향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한 헌금을 호소하였다. 4월 7일에는 일제히 폐점 철시 투쟁을 강력히 요구하는 경고문 제3호 300여 매를 등사하여 시내 상가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4월 13일에는 일제가 친일파를 앞세워 자제회(自制會)를 설립하여 많은 한국인을 강제로 가입시킴으로써 독립운동을 내부로부터 분열시키고 사전에 차단하려는 계획에 분개하였다. 그래서 자제회 설립에 앞장섰던 친일파 거두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 박중양(朴重陽)과 구장(區長) 백응훈(白應勳)에게 암살 경고장을 우송하여, 독립의 열의를 표출하였다. 1919년 3월 8일부터 전개된 대구 만세 시위 운동의 여파로 학생운동이 지하화되고 참가자의 낙향을 통해 운동이 지방 사회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더 조직적이며 효과적으로 수행할 비밀결사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에 4월 1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인 이영식 등과 함께 중심이 되어 혜성단(彗星團)이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혜성단은 대구에 본부, 경성과 만주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여 향후 전국적인 독립 만세 운동을 대비하고자 하였다. 혜성단은 인쇄, 배달, 자금 출납, 만주 출장 및 연락 등의 부서를 구성하였는데 최재화(崔載華)와 함께 인쇄 책임자가 되었다. 4월 18일 달성군(達城郡) 달서면(達西面) 내당동(內塘洞)의 방명원(方明園) 집에서 동지들과 만나 한국 민족의 궐기를 촉구하는 「근고아동포(謹告我同胞)」라는 제목의 격문 300여 매를 등사하여 시내 요소에 배포하였다. 4월 27일에는 다시 폐점 철시 투쟁과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 일화 배척을 주장하는 「경아동포(警我同胞)」라는 격문 300여 매를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이어 5월 7일에는 한국인 관공리의 민족적 각성과 독립운동 참가를 준엄하게 촉구하는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라는 제목의 격문 200여 매를 등사하여 도내 각 군수를 비롯하여 군청서기·면서기에게 우송하였다. 또한 5월 14일에는 다시 한국인으로서 일제 관공서에 근속하는 자들을 향해 경고하는 격문을 발송하고, 한국인 상인들에게는 폐점 철시 투쟁을 촉구하는 격문을 배포해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널리 밝히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본 군경(軍警)의 감시망에 발각되어 5월 중순경까지 주동 인물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일로 1919년 10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협박, 사문서위조행사 등의 혐의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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