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덕
金守德1904. 5. 6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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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4년 5월 6일 경기도 파주군(坡州郡)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파주군 와석면(瓦石面, 현 파주시 교하읍) 교하리(交河里)에 거주하였고, 학생이었다. 김동석(金東晳)·김수득(金守得) 등의 이명이 있다. 파주군의 만세 시위는 와석면 교하리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구세군이던 임명애(林明愛)는 학생 100여 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실행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3월 25일 김선명(金善明)과 함께 염규호(廉圭浩)·임명애 부부의 집에 방문해 만세 시위 예비 계획을 위해 방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승낙을 얻은 후 임명애·염규호·김선명·김창실(金昌實)과 함께 모여 만세 시위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격문을 만들어 면민들에게 배포하기로 결정하였다. 염규호가 마련한 등사판으로 ‘오는 28일 마을주민 일동은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만약 이에 불응하면 방화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격문 60매를 인쇄하여 구당리(九堂里)와 당하리(堂下里)에 배부하였다. 이들이 계획한 시위는 당초 계획보다 하루 앞당겨진 3월 27일 실행되었다. 27일 오후 4시 무렵에 와석면 교하리에는 약 700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다. 시위대는 와석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유리창과 지붕을 파괴하는 한편, 면서기 2명에게 투석하여 부상을 입혔다. 거센 만세 시위에 와석면장이 도망쳤고 시위는 확대되었다. 교하헌병주재소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세 곳에 각 500명씩 총 1,500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시위대는 횃불을 지피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파주 분견소로부터 하사 포함 3명이 출동해서 교하헌병주재소 헌병들과 더불어 폭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일본 헌병의 발포로 당하리에 사는 최홍주(崔鴻柱)가 사망하면서 만세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염규호·임명애·김선명 등과 함께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과 「조선형사령 제42조」를 위반한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를 제기하여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금고 8개월로 감형되었고, 출판물 반포의 항소 사실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9월 29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된 후 옥고를 겪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당했으며, 사망 일시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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