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달
金守達미상 ~ 1909. 4. 4
포상 정보
- · 애국장(199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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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6) 출생 연월일과 출신지, 집안, 성장 과정 등은 알려진 바 없다. 의병 활동 당시 주소는 강원도 회양군(淮陽郡) 장양면(長陽面) 삼해리(三害里)였다. 1907년 7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이어 한일신협약으로 인해 통감부가 내정간섭권을 대폭 강화하자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후기 의병은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강제로 해산당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세하면서 일본과 전면 전쟁 성격을 띠는 대일 항전으로 확대되었다. 해산 군인의 항전은 서울의 시위대부터 시작되어 원주·강화·홍주·진주진위대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각기 의병에 가담하여 전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강원도 인제·양구·회양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강원도 내 의병항쟁은 1907년 8월 5일 원주진위대와 원주주민의 연합 봉기로 시작되었고, 이후 도내 각지로 확산되어 갔다. 1907년 11~12월 도내로 확산된 대규모 의병부대는 특정 지역의 단일 부대가 아니라 소규모 의병부대들이 합세한 연합 의병부대였다. 의병 부대간의 연합작전은 전국 의병을 연합하는 구상으로까지 발전하여 13도 창의대진소가 결성되었다. 강원도 의병은 13도 창의대진소 구성원 중 가장 큰 비중을 이룬다. 이 시기 의병 활동 양상의 특징 중 하나는 대규모 의병부대라 할지라도 일정 지역에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동하며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부득이 한 형세였다. 강원 의병의 또 다른 특징은 대규모 화약제조소가 운영된 점이다. 강원도 내 화약제조소 운영 사례는 양구와 춘천의 두 곳이 확인된다. 양구 화약제조소의 설치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여기서 제작된 화약들은 자체 소비에 그치지 않고 인근의 의병부대에까지 공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양구 화약제조소는 1907년 11월 20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초토화되었으나 의병들은 다시 강릉으로 이동하여 화약제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08년 1월 이후로는 점차 소규모 게릴라적 전술로 전환하여 산악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유격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유격전의 양상은 1908년 6~7월의 ‘북부수비구 대토벌작전’ 이후로 점차 일반화되어 가고 있었다. 1909년에 들어서는 52개 의병부대가 파악되는데 이들은 대개 20~4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맞아 의병 20여 명을 이끌고 강원도 회양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1909년 4월 4일 인제군(麟蹄郡) 서화면(瑞和面) 장승동(長承洞)에서 양구(楊口)와 인제(麟蹄)에서 파견된 일본 헌병과 순사대와 1시간여의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2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회양군 장양면 삼해리 자택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뒤쫓아 온 일본군에 체포되기 직전에 탈출을 시도하다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주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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