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만
金承萬1890. 4. 25 ~ 1938. 10. 2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안동현임시의사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청년단
- · 평북독판부
- · 독립단
- · 광복군 참리부
- · 국민대표회의 남만주촉성회
- · 통일군단
- · 대한통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0년 4월 25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송장면(松長面) 운천동(雲川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죽림(竹林)이다. 1919년 4월 3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각도 별 구급의연금(救急義捐金) 모집의원 구성을 결의하면서 김재희(金載熙)·윤원삼(尹愿三) 등과 함께 모집의원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이승훈(李昇薰)·김지환(金智煥)의 요청으로 안둥현(安東縣)에 교통지국 설치 임무도 맡게 되었다. 이때 임득산(林得山)·유욱(劉郁)을 서울로 파견해 설치 자금을 확보하게 한 후 안둥현에 가옥 한 채를 사들여 교통사무소를 마련하였다. 사무소를 마련한 직후 교통사무소의 총무직을 맡았다. 더불어 김취곤(金聚坤)을 교통원으로, 장덕로(張德櫓)에게는 부내에 설치한 신문소(新聞所)의 편집 발행 업무를 맡겼다. 이후 안둥현에 있는 이륭양행(怡隆洋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의 안동교통국(安東交通局)이 설치되었다. 이에 오순근(吳淳根)·이영식(李英植)·박춘근(朴春根)·김두만(金斗萬)·김시점(金時漸)·오능조(吳能祚)·오학수(吳學洙)·장재순(張載淳)·김찬성(金燦星)·최지화(崔志花)·백일진(白日鎭) 등과 함께 안둥현 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조직하고 대표로 활동했다. 이해 11월에는 국내와 만주 일대에 난립한 청년 단체를 통합할 필요성을 느끼고 안병찬(安秉瓚)·김찬성(金瓚星)·김시점·오학수·김택(金鐸) 등과 콴뎬현(寬甸縣) 홍통구(弘通溝)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聯合會)와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단을 조직하고 총재로 취임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경기·황해·평남·평북 지역에 있는 20여 개의 청년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연합한 것으로 단원 수만도 약 2,0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안병찬이 안둥현에서 활동하던 중 붙잡혔다가 병보석으로 가출옥한 틈을 타서 콴뎬현으로 돌아오자, 그를 연합회 총재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무직을 맡았다. 이와 함께 1919년 독립단 의주지국(義州支局) 평북총감(平北總監)으로서 평북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2월에는 조병준(趙秉準)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대표 자격으로,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 안병찬·김찬성, 독립단 대표 김승학(金承學) 등과 콴뎬현 향로구(香爐溝)에서 만났다. 이들은 대한의용군사의회(大韓義勇軍事議會)·한족회(韓族會)·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청년단연합회 등의 지도자들을 방문해 통합을 권고하기로 하였다. 대표 자격으로 참가했던 평북독판부는 콴뎬현 호호둔(胡芦屯)에 근거지를 두고 평북 지역의 군자금 모집·친일파 처단·식민통치기관 파괴 등의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이 단체는 활동 지역은 평북 지역이 중심지였고, 본거지는 남만주에 두고 있었다. 또 평북독판부 간부들이 대한청년단연합회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한 단체처럼 움직였다. 1920년 1월 20일에는 임시정부 평북독판부 재무사장(財務司長), 2월 12일에는 조병준·김두만과 함께 평북독판부 최고간부, 4월 2일에는 다시 재무사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에도 독판대리(督辦代理)로 평북독판부를 이끌었다. 1920년 4월 9일 개최된 대한청년단연합회 제2회 총회에서는 다시 총무에 선임되었다. 1919년 말부터 조병준·김승학·안병찬·김찬성 등과 함께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한 결과로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한족회(韓族會)의 찬동을 얻어 1920년 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참리부(參理部)와 사령부가 구성되었다. 이때 참리부 협찬(協贊)으로 피선되어 이후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가 하나로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해 5월 안병찬을 비롯한 오능조·김응칠(金應七)·박예옥(朴禮玉)·양윤모(梁允模) 등이 일제경찰에 붙잡힌 뒤에는 평북독판부와 대한청년연합회 등을 이끌어갔다. 1920년 6월 대한청년연합회 의용대가 대한독립단과 합류해 단일 군사 단체로 출범하였다. 본부는 전 대한독립단 본부였던 류허현(柳河縣) 화사구(花斜溝) 복순성(福順成)에 두었다. 서울에는 중앙연락처, 각 도·군에는 지영(支營)을 설치하고 암살대와 방화대를 조직하였다.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가산을 털어 무기를 구입하고 이탁 등과 더불어 국내와 만주 일대를 무대로 무장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결과 1920년에만 일제 주재소 및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교전을 벌인 회수가 78회, 습격한 주재소가 56개소, 소각시킨 면사무소·영림서(營林署)가 20개소나 되었고, 95명의 일제 경찰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해 10월 일제는 만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잔학한 대학살庚申慘變을 저지르는 등 독립군의 활동을 저지하려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김승학·변창근(邊昌根)과 함께 부대를 6영(營), 3부분으로 나누어 각 2영씩 맡아 벽지로 옮겼다. 1921년 7월 말에 대원 15명과 함께 국내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평북 후창군(厚昌郡) 후창면에서 일제 경찰들에 포위되어 8명의 대원이 전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국내와 만주를 넘나들며 군자금 및 대원 모집·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 등의 활동을 지속하였다. 1922년 8월 30일 통군부를 비롯한 8개 단체 71명의 대표가 환런현(桓仁縣) 남구(南區) 마권자(馬圈子)에서 통일회의를 개최하여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결성하였다. 남만한족통일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회의에서 새로운 통합 단체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출범시켰는데 김동삼(金東三)이 총장에, 채상덕(蔡相悳)이 부총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대한통의부의 교섭부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9월에는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대동 통일을 목적으로 국민대표회의 남만촉성회國民代表會議南滿促成會 제2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부회장 겸 경리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1923년 대한통의부는 계파 갈등으로 의군부(義軍府)가 분립하였다. 1924년에는 의용군 대원들을 중심으로 참의부(參議府)와 정의부(正義府) 등으로 남만의 독립운동 단체가 다시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비탄하다 1935년 베이징(北京)으로 이주해 은거생활을 하던 중 병사하였다. 1976년 무후선열로 국립 현충원에 봉안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 ⋮박걸순⋮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