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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점

金時漸

188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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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시점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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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정주(定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정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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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청년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05인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곽산(郭山) 출신으로 기독교(장로회) 신자였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한 후 관산에서 외삼촌 이근택(李根宅)과 함께 잡화점인 한서상점(韓西商店)을 경영하면서 총무로 근무하였다. 동시에 곽산군 흥양학교(興襄學校) 회계계(會計係)로 근무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상업 경영에 참여한 연으로 이승훈(李昇薰, 1864.3.25~1930.5.9)과 교분을 맺었다. 1908년 이승훈의 권유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고, 선천지회 곽산분회 반장으로 활동하며 금광업에 종사하던 오학수(吳學洙, 1885~?)를 이승훈에게 천거하여 신민회 선천지역 반장인 양준명(梁濬明)의 문답 심사를 거친 후 신민회에 가입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오학수와는 함께 금광업에 관계하면서 각각 3만 원, 1만 원에 해당하는 거금을 투자하는 등 긴밀한 관계였다. 1909년 9월부터는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1년 10월경 105인사건 피의자로 구속되어 서울로 압송, 총독부 산하 경무총감부 용산헌병대에 구금되어 6개월간 고문을 받았다. 주요 혐의는 1910년 말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 참석을 위해 서순(西巡) 할 때 곽산에서 최정강(崔定綱)·김창대(金昌大)·오학수·이근택 등 곽산 지역 동지들을 이끌고 선천(宣川) 역 ‘환영식’에 나가 총독을 암살하려했다는 혐의였다. 이때 안태국(安泰國, ?~1920)은 평양에서 20명을, 이승훈은 정주(定州) 납청정(納淸亭)에서 30명을, 김구(金九, 1876.7.11(음)~1949.6.26)는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수십 명을 이끌고 총독을 암살하려고 선천에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가 삼엄하여 ‘모살 미수’에 그쳤다는 것이 일제 측 주장이다. 이는 일제 당국이 조작, 날조한 ‘데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의 허위사건 중 하나였다. 1912년 6월 28일 시작된 공개 공판정에서 기소된 피의자들과 함께 헌병경찰서와 검사정(檢事廷) 신문 때 가혹한 고문에 의한 강요된 거짓 진술이었다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2년 9월 28일 1심 공판에서 기소자 123명 중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 때 안경록(安慶祿, 1882.8.7~1945.5.7)·신효범(申孝範, 1878~1929)·이근택·오학수 등 39명과 함께 6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며,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 2심 공판 때 105인사건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尹致昊, 1865~1945)·양기탁(梁起鐸, 1871.4.2~1938.4.19)·임치정(林蚩正, 1880.9.26~1932.1.9)·이승훈·안태국·유동열(柳東悅, 1880.3.26~1950.10.18) 6인을 제외한 99인이 풀려날 때 함께 석방되었다. 출옥 후 중국 안둥현(安東縣)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안둥현에서 김승만(金承萬, 1890~1938)·오순근(吳淳根)·김두만(金斗萬, 1884~1942)·오능조(吳能祚)·박춘근(朴春根)·홍성익(洪成益, 1882~1920)·오동진(吳東振, 1889~?) 그리고 105인사건 동지였던 오학수·백일진(白日鎭, 1883~1921) 등과 안동현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조직, 총대(總代)로 활동했다. 같은 해 11월 콴뎬현(寬甸縣) 홍통구(弘通溝)에서 김승만, 오학수 등과 국내외 각 지방 청년단을 통합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결성했다. 동년 12월 제1회 총회를 개최하고 총재에 김승만·부총재에 박춘근(朴春根)이 선임되었으며,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1월부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연통제(聯通制)가 실시되면서 그 산하 평안북도 도독판부(道督瓣府) 내무사(內務司)에 임명되어 1년 6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동년 2월부터는 경영난에 빠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간행을 위해 주식 모집 운동을 전개할 때 찬성위원(贊成委員)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구한말 변호사로, 105인사건 공판 때 변론을 맡았던 한인 변호사 출신 안병찬(安秉瓚, 1854~1921)이 대한청년단연합회 총재로 추대되며 조직이 개편될 때 재차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22년경 외삼촌 이근택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광복될 때까지 평북 위원군과 강계군 일대에서 광업권을 갖고 광산업에 종사하였다. 1928년 위원군 위송면에 있는 광구(鑛區) 광업권을 설정하였으며 1930년 5월에는 이근택과 곽산 유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 7월에는 광업권을 이전받아 강계군 화경면에 이만광산사무소(梨滿鑛山事務所, 金銀鉛, 亞鉛)를 운영하였다. 한편 1934년부터 1937년까지 평북 도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2년 귀국 후 활동 행적을 볼 때 귀국하면서 친일로 훼절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당시 국내에 돌아오기도 어려웠지만 귀국 후 광산권을 허가받은 것과 도회의원으로 활동 점 그리고 함께 귀국한 외삼촌 이근택의 귀국을 일제 측 보고서에 ‘1922년 중 귀순’이라 한 점 등에 유념할 때 훼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도 ‘금산시점(金山時漸)’으로 창씨개명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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