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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중

金時仲

1895. 2. 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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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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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종성(鍾城)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종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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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훈춘한민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1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3) 1895년 2월 8일 함경북도 종성군(鍾城郡) 종관면(鍾關面) 산성동(山城洞)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북간도(北間島) 훈춘현(琿春縣)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12월 훈춘현 쓰다오거우(四道溝) 소황구(小黃溝)에 본부를 둔 훈춘한민회(琿春韓民會)에 가입해 독립군이 되었다. 훈춘한민회는 1919년 4월 13일 조직된 독립군단(獨立軍團)으로 한민회·한민단(韓民團), 또는 훈춘대한국민회(琿春大韓國民會)라고도 불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서북간도 지역에는 항일 무장활동을 전개할 많은 독립군단이 성립되었다. 경술국치(1910년)를 전후한 시기에 이 지역으로 망명한 민족운동가들은 1919년의 전 민족적인 만세 시위를 보며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품게 되었다. 따라서 10여 년간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며 준비한 역량을 총합해 무장 독립군단을 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훈춘한민회도 그 같은 배경 하에 성립되었다. 훈춘한민회는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기독교우회 회원들이 러시아 니콜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 있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지부인 대한국민의회 훈춘지부를 만들며 출발하였다. 이 지부를 10개월 후인 1920년 2월 훈춘한민회로 개명하였다. 성립 초기 회장은 이명순(李明淳), 부회장은 장학년(張學年)이었고, 그 아래 군무·경호·재무·교육·체신 등의 부서가 편제되었다. 대원은 약 150명이었으나, 1920년 8월경에는 250여 명의 독립군 병력과 소총 300정, 기관총 3정을 보유한 강력한 독립군단으로 발전하였다. 이같은 훈춘한민회 경호부 소속 경호원이 되어 항일 무장활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초, 주용삼(朱龍三)을 비롯한 수명의 대원과 함북 종성군 풍곡면(豊谷面)으로 진입하였다. 관산동(舘山洞)의 문석희(文錫熙) 집을 근거지로 삼은 후 부근의 부호들을 불러 모아 항일 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제공하도록 설득하였다. 그 결과 86원의 군자금을 모금해 본부로 귀대하였다. 같은 해 5월 25일에는 강석훈(姜錫勳) 등 20명의 대원과 유격대를 구성해 함북 온성군(穩城郡)으로 진입하였다. 미포동(美浦洞)·월파동(月波洞)에 있는 이취엽(李翠葉)의 집에 들어가 군량미 조달을 부탁하여 이취엽으로부터 곡식을 제공받았다. 같은 달 27일 경원군(慶源郡)으로 옮겨 경원면(慶源面) 증산동(甑山洞)의 산골짜기를 이동하던 중, 한국인 헌병보 최중악(崔仲岳)과 마주쳤다. 유격대는 순식간에 최중악을 처단하고 군도·권총·군복 등을 전리품으로 수거하였다. 이어 산중에 설치된 군용 전선과 전신주를 절단하고 행군을 계속하였다. 이후 헌병보가 사살된 것을 알게 된 일제 경찰대가 추격해오자 접전을 벌여가며 본부로 귀대하였다. 1920년 6월 2일에는 9명의 대원과 1대를 만들어 종성군으로 진입하였다가 일제의 종성경찰서 소속 경찰대를 만나게 되어 전투를 벌이고 귀대하였다. 같은 해 9월 9일 다시 경원군으로 진입해 경원면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종성군으로 옮겨 9월 말까지 풍곡면 일대를 돌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같이 국내 진공 작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일제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그 근간이 되는 이주 한인 사회까지 초토화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침략의 구실을 만들어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6개월여 동안 일제 침략군들은 3,700명이 넘는 독립군 및 한인을 살해·체포하고, 3,300여 채에 달하는 독립군 군영(軍營)·가옥·학교·교회 등을 파괴하고 소실시키는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자행하였다. 경신참변이 자행되는 동안 독립군들은 안정감 있는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또 많은 독립군들은 일시적 피전책(避戰策)을 택해 북만주(北滿洲)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립군들은 연합부대를 편성해 북간도 화룽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일대에서 1,000명이 넘는 일본군을 전사시키는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이루기도 했다. 한민회 또한 주력부대를 이동하며 연합부대에 가담해 청산리대첩에 일조하였다. 일본군이 철수한 뒤, 1922년 (음)1월 초 3명의 대원과 1조를 만들어 경원면으로 진입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런데 경신참변 이후 일제는 일본 영사관과 그 분관 경비를 구실로 북간도 내에 대규모 경찰력을 증강하였고, 독립군이 국내로 진입하는 통로인 국경지방의 군경(軍警) 수비를 강화하였다. 따라서 독립군의 국내 진입은 한층 어려워져 일제와 접전할 경우 승리할 수 있는 고성능의 새로운 무기와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새로운 작전이 필요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22년 11월 19일 5명의 부하대원들을 이끌고 소련 연해주의 한국독립군이 있는 수이푼(秋豊)에 다녀왔다. 그 뒤에도 한민회 동지들과 국내진입전은 계속 이어갔다. 1924년 1월 종성군으로 진입해 군자금 모집을 수행하다 종성경찰대에 체포되었다. 1924년 6월 27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후 7년 11개월간 옥고를 겪다 감형되어 1931년 11월 21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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